세종은 눈병을 치료하며 휴양하기 위해 초수리에 내려왔으면서도 한시도
정사를 놓지 못하였으니 윤 7월26일에는 김종서 등 호종제신들을 불러
전법을 개정하려는 뜻을 전하고, 전제상정소 제조인 예문관 대제학
정인지가 당도하는대로 함께 의논해 아뢰도록 한다.

그래서 윤 7월28일 정인지가 서울로부터 당도하자 행제소에 이미 먼저
와 있던 왕세자는 김종서 등을 불러 함께 전품, 즉 농토의 등급을 개정하는
일을 의논하게 된다.

농토의 등급에 따라 세금을 매기는 공법을 제정하기 위해서인데 이를
실사하기 위해 김종서 등으로 하여금 8월1일에는 부근의 청안현에 나가
볏곡을 직접 살펴보게 하기도 한다.

마침 이때 회령 성내에 들어와 살던 소로가무라는 여진인이 두만강밖에
거주하는 그 부모를 봉양한다는 핑계로 그의 내지인처와 함께 야인
본거지로 돌아가겠다는 청을 해오자 함길도 도절제사 김효성은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묻는 장계를 올린다.

8월5일 이 문제를 의논하는 자리에서 김종서는 우참찬 이숙치와 함께
돌려보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북변의 일에 관한한 김종서의 의견을 가장 존중하는 세종은 곧 그 의견을
좇아 돌려보내지 말라는 전교를 내린다.

그리고 8월12일에는 공법과 세금의 많고 적은 것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김종서는 제언축조의 필요성을 역설하게 되는데 동석했던 정인지도
경상도에 제언이 많아서 토지의 비옥도가 타도의 배가 된다고 거듦으로써
세종은 가뭄 극복을 위해 이를 정책적으로 실시해가기로 한다.

그래서 이 직무를 감당해 낼 만한 인물로 산술에 정통한 이순지
(?~1465)와 김담 (1416~64)을 지목하니 김종서는 이런 큰 일을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맡기면 영이 서지 않으니 정인지에게 총책임을 지우고
이순지와 김담을 종사관으로 삼는 것이 좋겠다고 아뢴다.

세종도 이를 찬성하고 이순지를 서울로 불러올려 일을 시작하게 하였다.

김종서는 다시 8월13일에 한확 이숙치 이승손과 함께 금년은 가뭄피해가
극심하니 농토의 등급을 매기는 일은 내년으로 미루자고 세종께 아뢴다.

세종은 즉시 이를 가납하고 도순찰사인 정인지에게 유서를 내려 충청도
비인과 경상도 함안 고령, 전라도 광양 고산을 제외한 그밖의 지역은
전품을 개정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이때 대마도 도주 종정성이 우리측에서 그가 잡아 보낸 왜구를
처단한 일로 항의하는 사절을 보내게 되자 김종서는 이숙치와 함께 청주로
가서 그 사신인 정대랑 등과 만나 이를 위로하니 8월 22일의 일이었다.

이곳 초수리에서의 휴양생활이 세종의 건강 회복에 많은 도움이 되자
의정부 대신들은 9월22일까지 작정한 휴양기간을 조금 더 연장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행재소의 호종대신들에게 서면으로 전한다.

이에 김종서 등은 8월24일에 세종께 조금 더 머무실 것을 청하지만
세종은 애초에 작정한대로 60일을 넘기지 않을 터이니 9월22일에 환궁할
준비를 하라고 잘라 말한다.

그런데 9월7일에는 초수리 북산에서 옥같은 돌을 발견하였다는 보고가
있어 세종이 옥공을 불러다가 파보게 하니 진옥이라 한다.

이에 김종서 등은 "예천의 곁에서 아름다운 옥까지 난다 하오니 신등은
기쁨을 이길 수 없어 하례드리나이다"하고 하례한다.

이에 대해서 세종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기뻐한다.

"옥이 물건이 되는 것은 악기로 소중히 쓰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악기"에서 옥 논하는 것을 중요하게 다루었고, 공자도 말씀
하시기를 옥은 소리 있는 것으로 고귀함을 삼는다고 하셨으며, 옛 글에도
이르기를 옥의 귀한 것은 소리가 있다고 하였다.

성천과 의주의 옥은 악기에 맞지 않고 중국은 곤륜산에서 나는데 다행히
흘러서 우리나라에까지 이르렀구나.

이제 이 옥이 돌속에 있고 또 소리가 있으니 나는 그것이 진짜 옥인가
싶다.

대저 옥의 산출은 실로 예악에 관계되므로 쓰임새가 지중하니 나는 사실
매우 기쁘다"

이렇게 초수 곁에서 미옥까지 산출되는 경사를 맞게 되자 세종과 호종
대신들은 매우 기분이 좋게 되었다.

그래서 9월15일에 도승지 이승손 등은 조금 더 이곳에 머물러 계시다가
10월초에 길일을 잡아 환궁하자고 청하지만 결단력이 남달랐던 세종은
이를 윤허하지 않고 처음 계획대로 진행하라 이른다.

그래서 9월22일에 어가를 돌려 상경하는데 이렇게 서둘러 떠났어도
24일 죽산에서 양지로 가는 도중에 폭풍설을 만나 고생한다.

그러나 경기도 관찰사 허후와 도사 윤면, 찰방 이백견 등이 잘 구호하여
사람과 가축이 얼어죽는 불상사는 모면하였다.

그래서 9월26일에는 어가가 경복궁으로 무사히 환궁한다.

김종서가 이 행차에 시종 시위하여 호종했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때 김종서의 나이는 62세이고 세종의 나이는 48세였다.

김종서는 이해 10월9일과 11일에 의정부와 육조의 대신들이 합좌한
어전회의에서 도둑을 방비하는 대책을 의논하게 되자 떼도둑들이 강도와
살인을 자행하는 사례를 들며 이들을 법대로 극형에 처할 것을 강도 높게
주장한다.

세종은 도둑이 일어나는 것은 자신이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마련해주지
못하여 살 곳을 잃었기 때문이라 자책하면서 가능한한 형벌을 가볍게 하여
이들에게 개과천선의 기회를 주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지만 중신들은 한결같이 이들이 도둑질하는 것은 생활이 어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치부와 사치를 위해서 그런 것이니 엄벌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 시기에는 생활이 풍요로워지자 가죽신의 수요가 급증하여
소가죽 값이 급등하므로 소나 말을 훔치는 소도둑이 극성을 부렸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도둑을 잡고보니 한달새에 말 세필과 소 두마리를 도둑질해
죽인 경우도 있고 한 마을의 농우를 씨말린 경우도 있었다 한다.

그리고 10월26일에는 대마도주의 사신으로 온 왜인 정대랑이 우리 벼슬
받기를 청하는 일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이를 거절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이전에 벼슬을 주었던 그의 부친은 우리나라에 와서 숙위를 했던 공로가
있었고 조전등구랑은 그 조상이 우리나라 사람이었기 때문인데 정대랑은
이런 조건에 맞지 않으므로 벼슬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대외문제에서 대개 김종서의 의견을 존중하는 세종은 이 역시 그대로
따른다.

또 11월19일 집현전 수찬 이선로가 궁성 서쪽에 연못을 파서 영제교로
물을 끌어들이고 개천물에 냄새가 나거나 더러운 물건을 버리지 못하게
하여 물을 청결히 하자고 계청하자 세종이 그 대책을 의정부와 육조에서
의논하여 아뢰게 하니 김종서는 영의정 황희, 우의정 신개 (1374~1446),
좌찬성 하연 (376~1453), 우찬성 황보인 등과 의논하여 다음과 같이
아뢴다.

"저수지 파는 일은 내년 가을을 기다려서 다시 의논하기로 하고,
개천물은 각 부와 한성부 낭청 수성금화도감 낭청이 성내의 각 집을
나누어 맡아서 냄새나고 더러운 물건을 던져 버리지 못하게 하여 깨끗하게
하도록 힘쓰며, 한성부 당상과 금화도감 제조로 하여금 항상 살피게 하고
사헌부로 하여금 무시로 규찰 검거케 하시옵소서"

이때도 서울 도성안의 환경문제가 심각하였던 모양이다.

오물 투척으로 청계천 물이 오염되어 불결해지니 관청에서 각 가정을
분담 관리하여 이를 책임지고 방지하자는 의견이다.

지금은 청계천이 아니라 한강이 썩어가고 있으니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이런 의견을 거울 삼아야 할 듯 하다.

관료사회가 아니라 민주사회인 현재에 우리는 어떻게 이런 오물 투척을
막아낼 수 있을까.

관청의 규제가 아니라 민간 상호규제에 의해서 이를 해결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도덕률과 법률 모두가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의
조성이 급선무일 듯 하다.

세종은 이때 우수한 병기 제조가 강병책의 기본임을 절감하고 화포와
총통의 시험 제조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으니 10월11일에는 진양대군 유와
광평대군 여 (1425~44), 금성대군 유 (1426~57), 동부승지 이사철
(1405~56), 병조참판 성념조 (1390~1450), 군기감제조 이순몽 (?~1449)을
양화나루에 보내어 배 위에서 이를 시험하게 하고 10월20일에는 왕세자가
직접 양화나루에 가서 화포의 사정거리를 측정하며 거함 3척을 왜선으로
꾸미고 이를 3척의 우리 군함이 격파하는 군사훈련을 실시한다.

그리고 11월1일에는 화포 제조를 직접 담당하고 있던 군기감 제조
이천 (1376~1451)이 우리나라 무쇠가 성질이 강하고 질기지 않아 주조가
쉽지 않은데 북방 야인들은 무쇠를 연철로 바꿔 군기를 만드는 기술이
있다 하니 이런 기술을 가진 자들을 초빙해다 이를 익히게 해달라고
계청하니 세종은 예조에서 이를 처리해주라고 김종서에게 맡긴다.

그리고 10월22일에는 지난해부터 시작해온 세종과 왕비의 어진 도사와
태조 태종의 어진 개화작업이 일단락 되는데 이 역시 김종서가
예조판서로서 총괄하여 이루어낸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종서는 이런 즐겁고 보람있는 일만 맡은 것은 아니었다.

11월24일 세종의 국구부인, 즉 장모인 삼한국대부인 순흥 안씨가
돌아가자 이의 장례 절차를 총괄해야 했고 12월8일 세종의 제5왕자인
광평대군 여가 불과 20세로 요절하였을 때와 다음 해인 세종 27년 (1445)
1월16일에 세종의 제7왕자 평원대군 임 (1427~45)이 19세로 요절하였을
때도 그 장례를 도맡아 처리해야 하였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