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어온 까닭에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이
흔히 시달리는 눈병 (안질)과 다리아픈 병 (각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서는 온천 목욕을 자주하여 병을 다스리는데 세종
23년(1441) 3월 17일에 온양온천에 와서는 그 치료효과가 컸었기 때문에
4월 17일에 그때까지 온수현이었던 온양을 온양군으로 승격시켜 온양이란
이름이 새로 생겨나게 하기도 하였다.

이때도 김종서는 형조판서로 어가를 호종하여 온양에 가 있다가
돌아왔었다.

그런데 세종은 25년 (1443) 봄에도 다시 각통이 도져서 온양으로 휴양을
떠난다.

지난해는 강원도 이천온천으로 갔었는데 아무래도 그 효험이 온양온천만
못하였던 듯하다.

그래서 3월 1일에는 왕비와 함께 서울을 떠나는데 왕세자와 대군.제군이
호종하고 의정부와 육조, 대간에서는 각기 한 사람씩 선발하여 어가를
호종케한다.

이때 김종서는 예조판서의 자격으로 육조를 대표하여 어가를 따라
온양온천으로 가게 된다.

아마 환갑이 된 김종서를 위로하기 위해 세종이 특별히 배려한 탓이었을
것이다.

세종은 온양에서 온천 휴양을 무사히 마치고 4월3일 온양을 떠나 4월6일
경복궁으로 환궁하는데, 상경한 다음 4월17일에는 병을 핑계대고 세자에게
섭정하도록 한다는 교지를 승정원에 내린다.

이에 김종서는 육조의 다른 판서 참판들과 함께 그 불가함을 아뢰고
예조참판 허후 (?~1453)와 예조참의 박연 (1378~1458)과 함께 연회에
여악을 쓰지 말고 10세 전후의 남자아이로 구성된 남악을 쓰자고 건의한다.

그러나 세종은 오랜 전례를 갑자기 바꿀 수 없다고 하여 이 건의를
일단 유보한다.

그리고 김종서는 9월 11일에 과거시험에서 정기적인 식년시외에 별시를
자주 베풀게 되니 선비들이 경서를 읽지 않아 인재가 고갈되므로 별시를
줄이고 식년시에 33명 뽑는 제도를 고쳐 50명씩 뽑게 하자고 건의하나
세종이 별시를 줄이는 것은 동의하되 인원 늘리는 것은 반대하여 실행되지
않는다.

문과 출신의 질적 저하를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9월24일에는 함경도 종성사람 김귀생이라는 자가 김종서에게
와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회령 사람 노겸과 정헌, 김삼보 등이 서로 말하기를 "4진을 설치하고
백성을 옮겨다 채워서 고생하게 하는 것은 찬성 황보인과 판서 김종서이다.

장차 마천령이나 철령 등 으슥한 곳에 숨어 있다가 황보인이 지나가면
쏘아 죽이고 또 서울로 가서 종서의 집 곁 나무 사이에 숨어 있다가
종서가 지나가는 것을 기다려 쏘아 죽이겠다"고 하므로 와서 고변한다"

김종서는 이 말이 허무맹랑하므로 곧 세종께 아뢰고 김귀생을 포박하여
본도로 보내어 문초하게 하니 상을 받으려고 거짓말을 하였다고 자백하였다.

당시 김종서와 황보인이 북변에서 얼마나 공명을 떨치고 있었던가를
보여주는 촌극이었다.

이해 11월13일에는 전제상정소가 설치되어 논밭의 등급을 조사하는
사업이 시작되었고 12월에는 세종이 고전을 모방하여 언문 28자를 몸소
만들어 내어 훈민정음이라 이름하며 집현전 학자들로 하여금 그 글자를
만들어낸 원리와 사용방법 등을 더 자세히 연구하게 한다.

그래서 다음해인 세종 26년 (1444) 2월16일에는 당시 운서의 기준이
되어 있던 "홍무정운"을 집현전 교리 최항 (1409~74), 부교리 박팽년
(1417~56), 부수찬 신숙주 (1417~75), 이개 (1417~56) 등으로 하여금
훈민정음으로 번역해 내게 하는데 왕세자가 수양대군 안평대군과 함께
그 일을 직접 감장하여 세종의 결재를 받게 한다.

이에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가 2월 20일 언문 제작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장문의 상소를 올리게 되고, 세종은 이를 조목조목 따지며 엄하게 꾸짖어
물리친다.

한편 세종은 늘 안질로 고생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치료할 수 있는 좋은
물을 찾고 있었는데 1월27일에 청주백성이 청주에서 호초맛이 나는 초수를
발견하였다고 고해오므로 장차 이곳으로 행행하여 안질을 치료하고자 하여
내섬시 윤 김완지를 보내어 이곳에 행궁을 짓게 한다.

그리고 추위가 풀리자 2월28일에 왕비와 함께 이곳으로 행행하는데
왕세자도 어가를 따른다.

세종 일행이 3월2일에 초수리 행궁에 도착하여 휴양 치료하게 되자
김종서는 3월11일에 이곳 초수리 행재소로 가서 기거를묻고 주과를 올리며
초수가 때맞추어 솟구쳐 나온 것을 경하한다.

여기서 세종은 60일간을 머물며 휴양 치료하고 5월 3일에 출발하여
5월7일에 환궁하는데 그 사이 상당한 효험을 보았던 듯 하다.

4월10일에는 성삼문 (1418~56)의 조부인 판중추원사 성달생 (1376~
1444)이 호종해 왔다가 초수리 행재소에서 69세로 폭졸하는 불행이 있기도
하였다.

세종은 이 시기 불교를 숭신할 마음이 점점 깊어져 벌써 지난해
4월27일에 양주 회암사 주지 천봉 만우 (1357~?)를 흥천사 주지로
옮겨오게 하였었다.

내외경전에 박통하고 시서에 능하여 유석의 사표가 될 만한 고승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를 통해 대장경에 의방이 있으며 그 판본이 흥천사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5월13일 이를 가져오게 하여 이를 읽으려 하니 우승지 유의손
(1398~1450)이 혹시 불교경전을 숭신한다는 오해가 있을지 모르므로
의관에게 살펴보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그렇게 한다.

그리고 나서 5월22일에는 만우선사에게 의복 네벌을 하사한다.

한편 김종서는 여름 가뭄이 극심하자 6월21일 서연에 우빈객으로
입시하여 원옥을 풀어 가뭄을 구할 것을 세자에게 고함으로써 역을 피해
달아난 죄로 조지서에 배정되어 도침 역을 지고 있던 양가 자제들을
풀어준다.

그리고 7월4일에는 진양대군과 세자에게 소금과 물고기 및 쇠의 이익이
막대한 것을 말하고 이를 국가에서 관장할 것을 권하며 백성들에게
국가에서 곡식을 대여해서 그 이자로 빈민을 구제하는 사창법을 시행할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그런데 세종은 점점 건강에 대해 자신감을 잃어가는듯 사후 대비를
더욱 철저히 해나가니, 7월17일에는 예조판서 김종서와 호조판서 박종우
등에게 명하여 장생전터에 장수기소를 짓게 하고 수릉에 부장할 수기들을
만들어 보관하게 하며, 헌릉 서쪽 언덕을 보토하여 수릉터로 닦아 놓는다.

그리고 윤 7월15일에는 다시 왕비와 더불어 청주 초수리로 휴양을
떠난다.

이 때도 김종서는 예조판서로 어가를 따라 호종하는데, 이 해 서울
부근은 가뭄이 극심하여 세종은 전국에 큰 흉년이 들었다고 생각하고 일절
공물의 진상을 올리지 말라는 어명을 내려서 어선 (임금께 올리는 음식)이
라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실제 충청도에 내려와 보니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피해가
크지는 않았다.

그래서 김종서 등은 7월20일에 풍년이 들었다고 하는 전라.경상 양도의
진상만이라도 허락하도록 세종께 계청하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병조판서 한확 (1403~56), 예조판서 김종서, 우참찬 이숙치 (1390~1446)가
여러 승지들과 함께 아뢰기를 "신등은 항상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볏곡이
거의 다 여물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요즘 어가를 따라서 지나온 곳은
볏곡의 충실함이 이와 같습니다.

전라.경상도는 꽤 잘 여물었다 하니 그 볏곡의 풍성함을 가히 알 수
있습니다.

청컨대 전라 경상 양도의 진상을 허락하옵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거둥은 본래 백성들에게 폐가 없게 하려 하였으니 경 등은 말하지
말라"

그 다음날에도 김종서는 여러 시종신들과 같은 내용으로 세종께 그
허락을 간청하는데 세종은 금년 기근이 태종 초년과 같다고 생각했더니
요즘 지나온 곳이 모두 잘 여물어서 매우 기쁘지만 어찌 기쁘다고 해서
진상을 허락할 수 있겠느냐고 단호히 그 청을 물리친다.

이에 김종서 등은 물러서지 않고 다시 이렇게 간청한다.

"지금 어선의 박함이 이와 같은데 이르렀으니 신등은 마음에 실로
유감스럽습니다.

또 옛 사람이 이르기를 "50세에는 고기가 아니면 배부르지 않다"고
하였는데 전하께서 춘추가 거의 50이 되셨고 하물며 상체가 편찮으심에
있어서랴, 어찌 진선을 이렇게 박하게 해야 옳겠습니까.

전하께서도 일찍이 태종의 어선을 친히 보살피셨으니 아실 터이지만
지금 어선이 이와 같이 박한데 동궁의 어선을 살피는 마음이야 그
어떠하겠습니까.

청컨대 신등의 소망을 좇으시옵소서"

그러나 세종은 "경들이 비록 반복해 말한다 해도 나는 끝내 듣지
않으리라"고 단호히 거절한다.

참으로 백성을 사랑할줄 아는 성군과 그런 성군을 제대로 보필하는
충성스런 현신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