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호 <한국경제연구원 자유기업 센터장>


집단행동은 이제 우리들의 삶에 일상적인 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이익집단의 집단행동이 대규모 시위로 표출될 때마다 사회정의나
경제정의의 실현이나 생존권보호와 같은 아름다운 내용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같은 구호는 호소력이 크기 때문에 아무런 비판없이 대다수 국민들의
갈채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같은 구호나 정책은 마음이 따뜻한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종교인들로부터 감정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어느 사회라도 이같은 구호나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들은 대개 특정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냉정한 사람들로
매도된다.

그래서 사회정의나 생존권보호 앞에서 냉철한 논리적인 주장이 나오기
힘들다.

집단행동은 대개 경제문제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집단행동은 십중팔구 이익집단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이익을 숨기기 위해 보통사람들로 부터 지지를 얻을수 있는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구호를 전면에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자 만큼 사회정의나 경제정의를 실현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던 사람이 있는가.

그러나 그들이 행한 실험의 결과가 과연 소외되고 약한자를 보호하였는가.

그래서 우리는 어떤 집단행동의 정당성 여부를 평가할 때 감정이나
구호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어떤 정책이 논쟁거리가 되어 있는 경우 과연 누구를 위한 정책인가라는
문제를 냉정하게 따져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 비용은 얼마이며, 누가 부담하는가라는 문제도 살펴보아야 한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특히 경제현상의 경우 더더욱 그렇다.

어떤 사람들이 갑이란 이익집단을 만들어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하자.

갑이란 집단이 이익을 확보하면, 여기에는 반드시 누군가 그 부담을 져야
한다.

노동법 개정문제를 살펴보자.

노동조합은 정리해고제의 도입에 불만이 많다.

이때 진보적인 지식인이나 양식있는 종교인이라면 정리해고제의 도입을
자본가의 이익과 근로자의 손해라는 단순한 2분법으로 보고 이들 사이의
갈등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문제는 이처럼 간단하지 않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갈 필요가 있다.

정리해고제를 도입하지 않는다면 현재의 노동조합원은 이익을 보는
그룹이다.

그러나 이때 손해를 보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우선 불필요한 인력을 가진 기업들이 생산해 내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사는 익명의 소비자들일 것이다.

다음으로 노동시장이 유연하면 취업기회를 가질 수 있는 신규 노동시장
진입자들이다.

이들은 대개가 고등학교나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것이 지금 당장 눈에 보일 만큼 큰 손해를 보는 그룹이다.

그러나 강력한 노동조합들을 유지했던 영국이나 뉴질랜드 프랑스 등의
나라를 보면 성장의 기반이 침식됨에 따라 그 부담을 다음 세대의 아이들이
떠안게 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노동 시장에 새로 들어오는 젊은이들과 아이들은 단체를
만들어 집단행동을 할 수도 없고 투표권도 없다.

그래서 정치가들로부터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한다.

소비자들 역시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기 때문에 영향력있는 이익집단을
만들기 어렵다.

그래서 역사는 경제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기 전까지 정치가들이
노동조합에 우호적인 정책을 실시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노동조합원들은 또한 소비자이기도 하다.

이들이 구입하는 상품과 서비스 역시 수많은 다른 종류의 이익집단의
요구에 턱없이 높은 가격과 낮은 품질의 상품이나 서비스를 공급받는
경우가 많다.

노동조합원은 노동법을 통해서 이익을 구할 수 있지만, 다른 이익집단들에
의해서 공급되는 상품에 의해서 손해를 보는 악순환이 일어나게 된다.

오늘날 우리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원한다면 난마처럼 얽혀 있는
이익집단들의 사슬을 풀어나가야 한다.

이익집단의 사슬을 벗어나는 일이야말로 사회정의를 외치는 지식인보다
약하고, 힘없고, 소외받는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돕는 일이다.

이같은 일을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갈등과 같은 단순한 도식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힘든 일이다.

집단의 이익이 첨예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는 갑이란 이익집단에 A라는 혜택을 주고, 다음에는 을이란
이익집단에 B라는 편의를 봐주는 식으로 나가게 된다.

물론 이익집단이 누리는 혜택에 비해 한 사회가 부담하는 총비용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이런 체제는 서서히 가라앉게 된다.

개구리를 뜨거운 물에 넣으면 금세 튀어 나온다.

하지만 찬 물에 넣어서 끓이면 개구리는 자각하지 못한 채 그대로
삶아져 죽게 된다.

이익집단들의 사슬로 칭칭 동여 매어진 사회는 결국 찬물에 개구리를
넣어서 끓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