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이는 동회 서기라서 논밭농사, 과수원의 배밭농사가 모두 내차지였죠.
그래서 손이 이 모양이지요.

삽질 괭이질에 내손이 이렇게, 농사손 놓은지 15년이 되었어도 아직도
이렇게 거칠고 매디가 굵지요.

그런 구질구질한 하소연 다해 무엇해요? 한 2년전부터, 이제 그이는
동서기 같은것 놓은지 오래죠.

친구따라 꼴프나 치면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세계 각국 안 간 곳이
없답니다.

그런데 이 노는 것이 문제예요.

아직 가운데다리는 쓸만 하지요.

열 계집 싫다는 남정네 봤어요.

작년부턴가는 아예 집에 안 들어오는 날이 많았어요.

나는 홧김에 가끔 술을 마시고 그랬지만, 아이들하고 잘 살아야지,
한때 남자 바람이려니 했는데,그게 아니더라구요.

날이 갈수록 수상해요.

흥신소인가 그런 것도 시켜서 뒷조사 해봤지요.

그러나 그놈들 그거 믿을 수 없어요.

모두 그이가 매수해서,모두 여자는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이가 나에게 손을 대기 시작했어요.

우리 큰아들놈이 아니면 나는 벌써 목숨이 나갔지요.

꼴프채로 막 두들겨요.

머리도 치고 허리고 치고,여자가 힘으로 남정네를 당할 수가 있습니까?

나는 정말 독약이라도 있으면 그 인간을 먹여 죽이고 싶다니까요"

"이젠 치면 112를 부르세요. 119를 부르든가. 진짜로 맞아 죽는 사람도
있거든요"

박춘희는 공박사가 그렇게 말하자, 진정 그녀가 자기편을 들어준다고
안심하며 기나긴 하소연을 계속한다.

공박사는 우선 박춘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진단해본다.

"술을 안 마신다는 아주머니의 말을 그대로 믿겠어요.

그러나 술은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우선 이성을 마비시키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죠. 그러니까 남편을
독살시키는 무모한 짓도 할 수 있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술을 마시지 마십시오. 뇌가 황폐해지면 행복한 인생을
못 살게 되니까요"

"잘 알겠습니다. 이렇게 그 인간의 못된 행동을 쏟아 놓고 보니 좀 살것
같으네유. 제 심정 아시지유?"

그녀는 글썽글썽 눈물이 고인 눈을 행커치프로 닦는다.

처음 들어올 때의 험악하고 딱딱한 표정은 사라지고 좋은 친구를 만난
듯한 안심스러운 모습이다.

이때 밖에서 똑똑 노크소리가 난다.

"누구시죠?"

"선생님, 면담은 오래 걸립니까?"

남편의 초조한 음성이다.

공박사는 남편도 안심시키기로 한다.

"들어오시지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편이 방으로 들어선다.

"부인께서 앞으로는 술을 안 마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알콜중독은 아니구요.

걱정 놓으십시오. 그러니까 입원을 할 필요는 더욱이나 없습니다"

공박사는 너그러운 미소를 띠면서 박춘희 여사의 남편을 바라본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