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도 나라도 이웃관계란 어렵다.

그중에 한국-일본 이상 꾀까다로운 상대도 드물 것이다.

양국은 내주에 정상대좌를 앞두고 있고, 그 준비로 내일이면 일본
외무장관이 서울에 오도록 돼있는, 따지고 보면 아주 가까운 선린관계다.

그러나 주말에 불쑥 불거진 전쟁위안부 보상금지급 시비를 놓고 볼때
갑자기 거리감은 커진다.

도대체 50년이 넘도록 전후처리에 이처럼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맴도는 이웃이 세계에 또 어디 있는지 새삼 숨이 막힐 지경이다.

연전 급조된 일본 민간단체 "아시아 여성기금"의 위로금 지급방법이 해선
안될 짓을 숨어서 하듯 떳떳지 못함은 기실 나무랄 가치조차 없다.

정신대란 몸값을 받는 매춘 영업이었지 강제동원 사실조차 없다고
강변하는 일본정부를 향해 공식 사과-보상을 요구하기란 허공에 주먹질
하기나 같은 일이다.

더구나 일본 국내사정은 악화일로다.

옛 사회당, 이즘의 민주당 일부처럼 과오의 시인 사과를 인정하는
양심파는 계속 쇠퇴하고 군국시대를 동경하는 보수 극우세력이 득세해
가고 있다.

이들은 정신대 부인에 그치지 않고 독도를 포함, 여러 인국들과의
국경문제에 완강한 자세로 버티며 양심을 숨기고 있다.

일본의 이런 항로복귀 배경은 복합적이다.

경제성장에 의한 중국세력의 급부상이 내심 가장 큰 부담일 것이다.

그렇잖아도 경제력에 상응한 거부권 욕구를 키워오던 일본으로서
가속되는 중국의 위협과는 대조적으로 내부로는 근년의성장정체, 고령화와
인구감소, 관료부패 등에서 오는 무력감은 열도침몰론으로 까지 이어진다.

이것이 바로 우경화-내셔널리즘의 발판이다.

이런 일본에 대한 한국의 전략은 무엇인가.

정체한다고 해서 총력으로 일본을 한국이 압도하는 단계는 아직 요원하다.

역시 한반도 문제를 포함,모든 국제문제에서 세계 여러 나라중 한국이
가장 폭넓게 공동보조를 취할수 있는 동반자는 일본이란 사실인식이
중요하다.

물론 한국에 미국이란 전통우방이 있고 지리조건에 불구, 일본보다
더 가까운 이웃이다.

그러나 미국을 가장 가까운 맹방으로 삼기로는 냉전해체 이후 팍스
아메리카나에서 일본을 포함, 세계 어느 나라도 선택의 여지란 없다.

우리는 세계화를 정치의 구호로서가 아닌 현실로 받아 들여야 하고
세계화 속에선 동반자를 많이 가질수록 유리하다.

그리고 고금 불문, 지리적 인접은 동반관계의 조건중 가장 자연스럽고
편리한 것임을 부인할수 없고 일본도 이점에서 같다.

그들이 한때 탈아입구를 시도한지 1세기반이 지났지만 과연 오늘의
일본은 유럽인가.

일 휴양지 벳푸의 김-하시모토 대좌를 우리는 주목한다.

어찌됐건 이제 아시아에서 단둘이 된 OECD 회원국으로서 위안부 문제는
물론 보다 고차원의 여러 공통문제 접근에 가슴을 열기 바란다.

원만한 유럽의 독-프랑스관계가 늦었더라도 아시아의 한-일간에서
구현돼야만 체면이 선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