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봉진 < 정치.경제.국제 총괄부장 >

대공황의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루스벨트는 1933년 대통령 취임사에서
"우리가 가장 무서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고 역설했다.

국민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한 그의 노력은 이에 그치지 않고 라디오를
통한 대국민 설득으로 이어졌다.

오랜 불황과 실업으로 좌절에 빠진 국민들에게 루스벨트는 "3R"을 외쳐
댔다.

구제(relief) 불황타개(recovery) 개혁(reform)을 뜻하는 루스벨트의 "3R
운동"이야말로 미국인들의 역량을 한데 묶어 공황으로부터의 대탈출을 실현
시킨 견인차였다.

김영삼대통령에게 루스벨트식 해법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한사람의 웅변으로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그럴듯한 웅변만으로 흩트러진 민심을 한데 묶을 수 있는 상황
또한 아니다.

그러나 무슨 속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제 그만하자"를 연발했던
김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은 무언가 허전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을 곰곰히 음미해보면 전혀 알맹이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대통령은 간간히 몇가지 의미있는 시사를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

특히 금융개혁위원회 설치를 밝히는 과정에서 그는 두 번에 걸쳐 "소유
위주로..."라는 표현을 썼다.

스쳐 지나가는 답변이었지만 이같은 표현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소유구조 문제야말로 금융산업개편이 가장 핵심적 과제요 난제중의 난제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말하는 "소유위주로"가 무엇을 뜻하는지 지금으로서는 분명치
않다.

금융기관 소유문제에 대해 대통령이 어떤 결심을 하고 있느냐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앞으로의 금융개혁의 중요한 방향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이른바 "소유와 경영의 분리"라는 명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명제처럼 잘못 해석되고 있는 것도 드물기 때문이다.

말은 그럴듯하다.

그러나 현실을 도외시한 허구중의 허구가 바로 "소유와 경영의 분리"문제
라고 할 수 있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는 말 그래로 소유와 경영을 따로 떼어 놓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돈들여 회사 만들어 놓고 회사를 움직이는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하든 개의치 않겠다고 할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만약 어떤 사람이 실제로 돈만 대고 경영을 도외시 한 채 한가롭게 골프
장에서 골프나 즐긴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 것일까.

돈만 대고 경영에는 관여하지 말라고 해서 순순히 그렇게 따라 하니까
이제는 무위도식하며 사치나 일삼는 부류로 매도하려 든다면 그것은 자가
당착이요 자체모순에 지나지 않는다.

조그마한 식당을 경영하더라도 주인이 식당에 나와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상태의 경영은 천지차이가 난다.

큰 기업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주인은 먼 장래까지 내다보는 경우가 많다.

단기보다는 장기적으로 회사에 도움이 되는가에 관심을 두게 된다.

당장은 고통스러울지 모르지만 내일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감내하자는
뜻에서다.

임기를 의식하며 단기적 실적에 연연하는 일부 경영인과는 차원을 달리
한다.

주인들은 외부에 공표되는 실적을 되도록 줄여 불필요한 세금이나 경비를
줄이려 든다.

반면 임기중 실적에 신경을 써야하는 사람들의 경우 세금이나 경비가
어찌되건 상관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밖으로 드러난 실적은 무조건 좋아야 하고 따라서 외화내빈도 서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나라 금융산업이 낙후돼 있는 큰 이유중 하나로 "주인
이 없다"는 점을 드는 사람이 많다.

주인이라면 하루 아침에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일도 이눈치 저 눈치 봐가며
차일피일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지나가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

컴퓨터가 금융산업의 구조자체를 뒤흔들 것이란 뻔한 사실 앞에서도 장기
투자에 인색하거나 이에따른 인사구조개혁에 소극적인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다른 사람들은 합병을 통해 대형화를 하고 국제화 전문화에 열을 올리지만
큰 변화없이 그냥 지나치려는 경영인 또한 같은 틀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금융기관의 "주인 찾아주기"는 금융개혁이라는 난제를
푸는 중요한 열쇄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대통령은 지난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경제를 살리겠다"고 했다.

이는 "표를 잃더라도 경제를 살리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미 대통령은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노사관계법처리가 그 예였는지 모른다.

금융개혁도 소신이 서는 한 경제를 살리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풀어야 한다.

루스벨트 말대로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인지
모른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