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7일 서울 강남의 레스토랑 "아데네".저녁 7시를 전후해
경제기자들에겐 얼굴이 제법 알려진 장년의 신사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모두 경제단체 및 업종별 협회 상근부회장들.

이날은 바로 이모임(이대로회)의 부부동반 송년식 날이었다.

매달 한번씩 열리는 이 모임의 주요 화제는 보통 우리경제의 현주소나
전망등.

그러나 때로는 서로가 하는 일에 대한 어려움의 호소로 얘기가 끝날 때도
많다.

대부분 정부관료 출신인 그들에겐 과거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던
기업의 입장을 대변하는 일이나 후배관리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하는
입장이 적지않은 고통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상근부회장-.

주요 업종 단체를 이끌고 있는 인물들이다.

산업의 전면에서 업계의 발전을 위해 밤낮 없이 뛰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물론 어느 단체든 회장은 있다.

그러나 회장은 회원사 대표가 돌아가면서 맡는 비상근이 대부분이어서
실제 살림을 맡아 보는 총책은 이들 상근부회장이다.

자연 상근부회장들에게 지워진 짐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우선 회원사의 이익을 옹호해야 한다.

회원사와 정부, 회원사와 소비자 사이에 서 궁극적으론 회원사들의 이익을
위해 총대를 메야하는 것이 바로 상근부회장들의 첫번째 임무인 셈이다.

실례를 찾아보자.

얼마전 정부는 유화업체들에 폐합성수지처리요율을 합성수지판매가격의
0.7%에서 3.0%로 올리겠다고 했다.

당연히 유화협회 유인봉부회장이 나섰다.

그는 우선 산업연구원에 연구용역을 의뢰, 정부의 결정에 대한 합리적인
반박자료를 얻은 뒤 환경부등 관계요로를 뛰어다녔다.

그 결과 폐합성수지처리요율은 아직 0.7%로 남아 있다.

또다른 사례.

주유소의 옥외광고를 세개이상 세울 수 없다는 규제가 생긴다는 소식이
석유협회에 들어왔다.

홍찬기부회장이 내무부로 뛰었다.

담당자들에게 업계 사정을 설명하고 설득에 설득을 거듭했다.

그뒤 이 일 역시 없었던 일로 됐다.

상근부회장이 짊어진 두번째 짐은 업계 의견을 조율하는 일이다.

일단 회원사가 한 목소리를 내야 문제해결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원사들도 따지고보면 서로 동종업계의 경쟁자들이어서 사안에
따라서는 첨예한 대립을 하는 경우가 흔히 있을 수밖에 없다.

세번째는 업계 협력의 메신저 역할이다.

"해외시장에서의 경쟁이 무엇보다 중요해지면서 회원사간 정보공유는 물론
기술의 공동개발, 설비 증설 조정 등의 업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화섬협회
이만용부회장)는 것이다.

철강협회가 업계와 공동으로 철강재 주택 클럽, 철강재 건설 클럽 등을
구성해 공동의 신규수요 창출에 나선 것은 하나의 사례다.

물론 이런 사업에 정부의 도움을 끌어들이는 것은 부회장의 몫이다.

요즘에는 소비자와의 관계개선도 대정부 업무 못지 않게 상근부회장의
중요한 역할로 꼽힌다.

철강협회가 지난달 27일 철강홍보위원회를 구성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그런가하면 자동차공업협회는 매년 "어린이 자동차 그리기 대회"를 열어
자동차산업에 대한 좋은 이미지 조성에 앞장선다.

기존 회원사들의 입장에서 "외부의 침입자"를 막아주는 것도 부회장의
주요 임무중 하나다.

삼성그룹이 자동차사업 신규참여 추진때 반대논리제공에 앞장섰던
자동차공업협회의 입장이 그 단적인 예. 이처럼 역할이 만만치 않다보니
직무수행과정에서는 물론 인간적인 어려움도 많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업계의 나팔수"라는 외부의 비난.

경영자총협회의 조남홍부회장은 노동계의 "공적 1호".

항상 사측만 대변하다보니 협박성전화에 시달릴 때가 많다.

화형식도 여러번 당했다.

문제 해결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때 소속사들의 비난을 한몸에 받아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회원사들이 출연하는 예산이 많지 않은 탓에 직원들의 복지에 좀처럼
신경을 쓸 수 없다는 점도 이들 노신사-상근부회장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대목이다.

< 김정호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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