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수 박사는 노트에 기록된 이 우울증 환자의 이름을 읽다 말고,
"미안하지만 부인의 사진 같은것 가지고 계신가요?" 하고 엉뚱한 질문을
한다.

무엇인가 핑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이다.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약혼사진이에요"

황기백이라는 이름의 주민등록증옆에서 예쁜 여자의 사진이 나온다.

둘이 이마를 맞대듯이 하고 찍은 사랑스러운 젊은 한쌍의 사진이다.

자세히 새댁의 얼굴을 보니 그 우울한 남자의 와이프는 언제인가
공박사에게 왔던 환자였다.

한 반년쯤 전이었던 것같다.

공박사는 특이하게 기억력이 비상했다.

"됐습니다. 두분의 정다운 사진 잘 봤습니다"

새같이 작고 아름다웠던 그녀의 인상은 하도 애련해서 쉽게 잊혀지지
않는 환자였다.

그때 그 여자의 고민은 자기 남편과 병원에 같이 나와서 치료를 받아야
할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남편이 자기를 끊임없이 의심한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자기를 의심하면서 어디 가지도 못하게 하고 어떤 때는 문을
밖에서 자물쇠로 잠그고 다닌다는 것이다.

새나 버러지가 아닌 이상 그렇게 갇혀 있다는 것도 정말 징그러운
일이고 남편의 이 심한 의처증을 고칠수 있는 분이 공박사님 같아서
찾아왔다는 것이다.

공인수는 그때 그녀에게 남편과 같이 오라고, 같이 와서 치료를
받아보면 좋을것 같다고 했는데 그 여자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었다.

의처증이 심한 이 남자도 자기가 결코 병적이 아니라고 굳게 믿기
때문에 결국 그 와이프로서는 가출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바로 그녀의 남편이 지금 와이프를 잃은 후에야 스스로 병원으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걸어 들어와서 불면증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그녀는 황기백에게 잠을 잘수 있도록 약을 처방해주고 충분히
잠을 잔 후에 다시 와서 치료를 받도록 했다.

눈이 빨갛게 충혈된 그 남자는 우선 재우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공박사는 진단을 했다.

가끔 의부증을 가진 여자들도 오고 심한 의처증에 시달리는 부인들도
온다.

그러나 의처증은 현대의학으론 완치시키기 힘든 병이다.

잠을 자게 하거나 신경을 안정시킬수 있는 약은 있어도 끊임없이
와이프를 의심하는, 그 의심 자체를 없앨수 있는 약은 없다.

더구나 황기백이 곤란하게 된 것은 그 와이프가 도망치고 옆에 없어서
같이 치료를 받기가 힘들게 됐다는 점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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