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 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김종서 (1383~1453)가 여진을 정벌하여 육진을 개척하고 두만강을
국경으로 확정해 갈 때 두만강 가에 석성을 쌓고 장대에 올라서서
대장부의 기개를 한껏 뽐낸 호기로운 시조이다.

김종서는 세종 12년 (1430) 8월16일에 우대언, 즉 우승지가 되어 세종을
측근에서 모시면서부터 북변을 시끄럽게 하는 여진족 즉 야인을 정벌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확정짓자는 적극적인 북방정책을 수시로
진언한다.

이에 세종대왕은 조종의 땅을 한 치도 줄일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로
김종서의 주장을 받아들여 세종 14년 (1432) 12월9일 파저강 (가강,
고구려의 발상지인 환인지역) 일대에 거주하는 여진족 추장 이만주가
여연군에 침입하여 백성과 가축을 약탈해 달아난 것을 계기로 15년
(1433) 3월17일에 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 (1376~1445)에게 명하여 이를
정벌하게 하니 최윤덕은 평안도 군사 1만과 황해도 군사 5천을 이끌고
4월19일에 정벌을 성공적으로 끝마친다.

그런데 이 해 11월29일에 현재 회령인 알목하에 우리 조정의 허락을
받고 들어와 살던 오도리 (알타리로 표기하기도 한다)족 추장 동맹가첩목아
부자가 오적캐족의 침입을 받고 살해당하는 일이 일어난다.

이에 세종은 북변의 국경을 확정할 기회라고 생각하여 북방경략의
강경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좌승지 김종서를 12월9일자로 함길도도관찰사로
임명한다.

김종서가 51세, 세종이 37세 나던 해의 일이다.

즉시 부임한 김종서는 불과 한 달도 못되는 시기인 다음해 세종 16년
(1434) 1월6일에 도정 전반에 걸친 조사보고서를 올리고 2월14일에는
도체찰사 하경복 (1377~1438), 병마절제사 성달생 (1376~1444),
영북진절제사 이징옥 (?~1453) 등과 함께 성을 쌓아 진을 베풀만한 곳을
살펴보고 그 내용을 세종께 보고한다.

그리고 나서 석막에 설치했던 영북진을 백안수소로 옮겨 종성이라 하고
알목하에 회령진을 설치하고 회질가에 경원진을 설치하며 공주에 공성진을
설치한다.

두만강 변에 4진을 설치한 것이다.

이렇게 북변을 성공적으로 정리해 나가자 세종은 김종서로 하여금 계속
그 일을 소신 있게 처리해 나가게 하기 위해 17년 (1435) 3월27일에는
함길도 병마도절제사의 자리로 옮겨앉게 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해 8월에 김종서는 모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모친의 간병을 위해 사직을 청하니 세종은 9월4일에 왕명으로
불러서 모친을 뵙게 하는 형식으로 이직을 허락하고 그 직무는 도순검사
하경복이 잠시 겸직하게 한다.

김종서가 상경하자 세종은 9월9일에 그를 불러 북변을 다스리고 방어하는
일을 자세히 묻고 이미 어의를 보내어 극진히 보살피게 하던 그 모친의
병환을 걱정한다.

그러나 그 모친이 병환을 이기지 못해 돌아가니 세종은 11월10일
김종서에게 모친 장례 후에 임지로 돌아갈 것을 명령한다.

다음 해인 세종 18년 (1436) 1월21일 김종서는 모친의 장례를 마치고
3년상을 치르게 해 달라고 상소를 청하지만 세종은 이를 듣지 않고 백일
후에 상복을 벗고 임지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다시 내린다.

그리고 2월1일자로 김종서를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로 재임명하는 칙지를
내리고 뒤이어 2월11일에는 상복을 벗고도 채식을 고집하여 심상을 지키고
있는 김종서에게 다시 왕명으로 육식을 권하고 변방을 지키는 장수의
책임이 막중함을 경계한다.

이런 상황이니 김종서는 왕명을 받들어 함길도 임지로 다시 내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4월19일에는 부거성을 용성으로 옮겨 도호부로 승격시키고
11월9일에는 내년 가을에 야인을 정벌해야 하는 불가피성을 상소로 밝힌다.

여기서 김종서는 야인의 상대 방법에 대한 유자의 통념이 그릇된
것이었음을 지적하고 그 대처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 일단을 소개해 보겠다.

"유자들은 모두 이르기를 이적을 대하는 방법은 오면 어루만지고 가면
곧 추격하지 않아서 원수를 맺지 않고 틈을 내지 않는다고 하며, 또
이르기를 화친이 귀하니 이 계책을 얻은 자는 편안하고 이 계책을 잃은
자는 위태롭다 합니다.

신도 또한 상시에 있어서는 매양 이렇게 말하였을 뿐입니다.

신이 북쪽 가에 나와 지키면서 야인들과 더불어 섞여 살며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그 정상을 자세히 알게 되니 야인은 천태만상이라 한가지
논리만을 고집할 수가 없습니다.

은혜가 없으면 그 마음을 기쁘게 할 수가 없고 위엄이 없으면 그 뜻을
두렵게 할 수 없으며 은혜가 과하면 교만하고 위엄이 과하면 원망합니다.

그러나 원망해서 난을 일으키는 자는 위엄을 두려워해서 혹시 감히
움직이지 못하기도 하지만 교만해서 걱정거리가 되는 자들은 경멸하여
더욱 그 해독을 펼치니 은혜와 위엄은 한 쪽만 폐할 수가 없습니다"

다음 해인 세종 19년 (1437)은 김종서가 55세, 세종이 41세 되는 해였다.

이미 장년기에 접어들어 불혹과 지천명의 단계에 이른 현군과 명신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야인을 정벌하여 북변을 정리하고자 하는 열의를
불태우고 있는데 어찌 그 성과가 미미하겠는가.

4월11일에는 도절제사 김종서와 감사 이숙치 (1390~1446)가 함께
상소하여 오적캐 정벌의 불가피성을 다시 주장한다.

저들은 인의지심이 없고 이리와 같은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저들을
토벌하지 않으면 조선이 겁많고 약해서 토벌하지 않는다고 여겨 우리
국경을 자주 침입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세종은 의정부에서 이의 가부를 의논케 하니 동지중추부사 정흠지
(1378~1439), 호조판서 심도원 (1375~1439), 병조판서 황보인 (?~1453)
등이 모두 4진이 신설되어 아직 공고치 않으니 멀리 나가 토벌할 수
없다는 반대 의견을 제시한다.

종서의 식견과 판단력을 믿는 세종은 북변정책의 실패가 우려되어 기회
닿는 대로 야인의 침략 여부와 방비 태세에 관해 김종서에게 전지를 내려
하문하는데 끝내 안심이 안되어 8월6일에는 세종 자신이 친히 짓고 세자로
하여금 친서케 한 밀서를 환관에게 주어 김종서에게 직접 전하게 한다.

여기서 세종은 자신의 북변정책 의지가 확고부동하다는 사실을 김종서에게
알리고 야인들을 우리 강토 안에 들어와 살 수 없다고 한 태종의 뜻을
확실히 계승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현재 상황을 정확히 보고하라고 한다.

김종서는 이 밀지를 받고 감읍하여 역시 자필로 밀서를 올리는데 세종이
일찍이 조정의 땅은 한 자 한 치라도 포기할 수 없다고 고집하며 군신들의
의견을 좇지 않던 일과 그때 자신이 대신을 설득하여 석막에 영북진을
설치하던 일들을 상기하며 이제는 북변의 요해처를 자신이 모르는 곳이
없으므로 그 요해처마다 군진을 베풀어 국경을 수비하겠노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그리고 현재 조정에서 용성진을 경계로 국경을 삼자는 논의가 있다고
하는데 이는 지리를 모르는 망언이며 이런 식으로 요새를 경계로 하자고
한다면 장차 마천령이나 철령으로 국경을 삼자는 망언이 또 나오지
않겠느냐고 통박한다.

이어서 용성으로 경계를 삼는다면 1불의, 2불리가 있다고 하며
열거하는데 선조의 땅을 줄이자고 하는 것이 1불의요, 산천의 험난함이
없어 지키기 어렵다는 것이 2불리라고 한다.

그에 반해 두만강을 경계로 하면 왕조를 일으킨 땅을 회복하니 1대의가
되고 장강의 험난함이 있어 지키기 쉬우니 2대리가 있는 것이라며 반드시
두만강을 국경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조정 대신들의 반대 이유가 되는 민력의 피폐와 경비 부족,
군사력 부족, 야인들의 지속적인 침략등에 대한 세종의 우려에 대해서는
처음 북변 경영을 시작하던 당시의 어려움에 비하면 현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신감을 당당하게 피력한다.

세종은 이 밀서를 보고 나서 곧 환관 엄자치를 시켜 어의 한 벌을
김종서에게 하사하면서 이렇게 전하였다고 한다.

"내가 북방의 일에 밤낮으로 걱정하여 마음 둘 데 없더니 이제 경의
글을 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이에 북변 경영에 대해서 확실한 자신감을 얻은 세종은 8월20일에
김종서에게 전지를 내려 평안도 압록강 연변의 축성례에 따라 두만강
연변에 있는 모든 성도 중국의 성처럼 성위에 옥우를 두어 항상 들어가
지킬 수 있게 하라고 한다.

이렇게 되니 8월29일 홀라온추장의 귀순을 시작으로 점차 야인들이
귀순해 와서 김종서의 보호를 자청하게 된다.

아마 이런 시기에 이 호기에 찬 시조를 읊었을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