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만리장성이 축조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14년이다.

진시황이 기원전 221년 중국을 통일한 뒤 북부의 흉소족과 다른
유목민족들의 침입을 막고자 30만 대군을 비롯 100여만명의 민간과
죄수들을 강제 동원하여 9년에 걸쳐 만든 것이 그 출발이었다.

당시의 장성은 서쪽의 감숙성 남부 민현에서 동쪽의 요동 요문에 이르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한 많고 슬픈 전설이 전해져 내려 온다.

맹강여의 남편은 만리장성을 쌓는 일에 강제로 끌려갔다.

그녀는 그곳이 추운 북쪽이라는 말을 듣자 따뜻한 옷을 지어 가지고
북쪽을 향해 떠났다.

오랜 여행끝에 가까스로 그곳에 도착했으나 하랑하는 남편은 이미 죽고
없었다.

시체만이라도 찾으려 이곳저곳을 헤메면서 대성통곡을 했다.

그때 갑자기 장성의 한 곳이 허물어져 남편의 시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일기에는 남편을 죽게 만든 만리장성이 허물어져 버리기를 바라는
여인의 원한이 담겨져 있다.

그런데도 만리장성은 시대를 내려 오면서 백성의 피와 땀으로 보수
또는 연장축조되고 또 위치가 옮겨졌다.

홍나라때는 서쪽의 성을 감숙성 포황외곽의 옥문관까지 연장했다.

진 한시대의 장성은 지금보다 훨씬 북쪽에 뻗어 있었다.

그것이 현재의 위치로 남하한 것은 5세기의 여 때와 6세기의 북제때의
일이다.

북제때는 동쪽의 성이 산해관에 이르게 되었다.

오늘날처럼 서쪽의 감숙성 가욕관에서 동쪽의 하북성 산해관에 이르는
2,7000km의 만리장성이 완성된 것은 명나라때에 와서다.

청나라때엔 만리장성은 군사적 의미를 상실하고 중국본토와 만주
몽골지역을 구획하는 정치적 행정적 경계선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장성의 원형이 손상되거나 개조된 것이 적지 않았다.

만리장성의 동쪽끝 부분의 정문인 산해관도 1842년 아편전쟁 이후
방어력을 높이기위해 중국의 전통성후양식인 루각식을 누락의 구면에
총구가 있는 전루식으로 고쳐진 것이라고 그동안 추정되어 왔다.

그것이 사실임을 입증해 주는 자료가 한국에서 발견되었다.

1760년 청나라에 파견된 조선사절단의 화공이 어명에따라 산해관의
전면과 내부의 사실적 모습을 담은 [영조대왕화 "(LG연알문고 소장)의
담채 그림 2폭이다.

오랜동안 산해관의 원형 복원 근거를 찾지 못해 고심해 오던 중국의
학계가 환희작약했다는 소식이다.

한.중 학술교류에도 일역을 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같게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