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채 누이, 나, 소상관에 가서 대옥의 영구를 보고 오면 안 될까?"

보옥이 터져나오는 울음을 자제하며 눈물 젖은 얼굴로 보채를 바라보았다.

"도련님이 신랑이 된 지 며칠도 되지 않는데 어떻게 대옥의 빈소에 가서
곡을 할 수 있겠어요?

무엇보다 대옥의 혼령이 곡을 하는 도련님의 모습을 보면 황천길을
가려다가 도로 돌아와 구천에서 떠도는 원귀가 되기 쉬워요.

그러니 대옥을 위해서도 도련님은 칠칠재를 지낸 후에 둘러보는게 좋을
거예요.

대옥이 자기 시신을 강남 소주로 운구해달라고 유언을 했기 때문에
영구가 철함사 같은 데 오래 머물러 있을 거예요"

보채가 타이르자 보옥이 잠잠히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소상관으로 달려가본들 대옥의 얼굴을 보지도 못할 것이고 영구
앞에서 통곡을 해본들 죽은 대옥이 다시 살아 돌아올 리도 없었다.

"그럼 보채 누이, 우리가 혼인식 날 초야를 함께 치렀지만 대옥 누이
칠칠재를 지낼때까지는 합방을 하지 않도록 하자.

우리가 밤마다 몸을 섞으면 대옥의 혼령이 더욱 원통해 할 거니까
말이야"

보옥의 눈앞에는 원통함을 풀지 않은 자들이 지옥 불길에 고통당하는
모습이 어른거렸다.

"그렇게 해요. 아닌게 아니라 아직도 귀비 원춘마마 국상중이니까
몸가짐을 조심해야지요.

낮에는 도련님과 함께 있다가 밤에는 내가 딴방에 가서 잘게요"

보옥은 자기 의견을 따라주는 보채가 믿음직스럽기까지 하였다.

어쩌면 누나 같은 보채가 보옥 자신의 배필로는 더욱 어울릴지도
몰랐다.

"잠깐 누워 보세요. 침을 놓아드릴게요"

보채가 은침들을 꺼내 보옥의 머리와 가슴 곳곳에 꽂았다.

보채는 집에서 침술을 틈틈이 익혀 이제는 웬만한 의원 못지 않게
병증에 따라 적절한 경혈을 찾아서 침을 놓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보옥은 그런 보채의 정성어린 보살핌으로 더욱 정신이 안정되어갔다.

그러자 양기도 되살아나 보채를 안아보고도 싶엇지만 보옥 자신이
제안한 대로 대옥 칠칠재까지는 참기로 하였다.

대옥의 칠칠재가 치러진 후,보옥은 대옥의 영구가 놓여 있는 철함사로
가 그동안 억눌러왔던 슬픔을 토해놓았다.

"대옥 누이, 너무 원통하게 여기지 마. 내가 통령보옥을 잃어버려
정신이 이상해지자 집안 어른들이 금과 옥의 인연을 맺어주어야

내가 낫는다면서 보채 누이랑 혼인을 하도록 했던 거야. 대옥 누이도
보다시피 그 혼인 덕분에 내가 이렇게 멀쩌해져 대옥 누이 영전에
앉아 있잖아"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