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모가 가까워지면서 여기저기 송년모임이 줄을 잇고 있다.

일년에 한번인데 하면서도 이런걸 꼭 해야하는가 곱씹어보면 그만두는게
나을 성 싶은 것이 수두룩하다.

직장별로 열리는 동문회와 향우회가 그렇고 재경동문회와 재경향우회라
해서 다를게 없다.

많이 배운 사람들이 이런 일에 앞장을 서는 것을 보면 한심하기 까지
하다.

지금이 어느때 인가.

국제수지적자 200억불과 외채잔고 1,000억불이라는 부끄러운 경제지표를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는때가 아닌가.

온 국민이 정신 바짝 차리고 살길을 찾아 나서도 쉽지 않은 터에 우리의
발목을 잡아당기는 너절한 인습들은 왜 이렇게 끈질긴지 모르겠다.

때마춰 이리저리 다져지는 친목과 크고 작은 세력이 또다른 세력과
연결되는 과정은 적어도 선진국에는 없는 풍습이다.

합리적 정당, 합리적 기업, 한마디로 합리적 사고와 행동을 가로막는
요인들이 제거되지 않고는 우리의 근대화는 아직 시작이 불과하다.

근대화란 한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급적 개체화하고 이들이
공동선(에토스라 해도 좋고 멋있는 작품이라 해도 좋다)을 향해 온갖
창의력을 발휘하도록 도와주는 과정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선진국에 진입한 나라들이 지금
OECD(경제협력개발기구)니 WTO(세계무역기구)니 해가면서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망하고 "개산주의"가 승리한 것이다.

"가산주의"에 의해 선진국의 막대가 된 일본도 소위 일본적 경영을
반성하고 미국적 경영으로 돌아서고 있는게 요즘의 판세다.

아직도 중앙집권적 통치구조하에서 "족산주의"에 머물고 있는 우리나라
기업의 경영을 어떻게 선진화 할 것인가.

혈연 지연 학연으로 얽어놓은 우리식 정치에 몰려있는 우리식 경영으로
선진국 진입은 가능한지,안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우리는 지금 어디에
와 잇는지 조차 모르고 방황하는 것은 아닌가.

미국의 경영학을 번역하는 수준으로 학교나 사업장을 돌며 강단을
오르내리는 연사가 많다해서 될일이 아니다.

선진국과 후진국을 바라보는 두가지 대립된 견해를 냉정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프란츠 파농은 "선진국은 후진국의 것"이라 했다.

선진국은 후진국을 원료로 해 제조됐다는 뜻이다.

이제는 선진국이 원료가 되어주어야 할 차례다.

후진국은 자급자족으로 선진국 시장을 봉쇄하고 저들이 원료로 나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또 다른 견해는 후진국이 잃은 것만 있는게 아니라 그덕으로 중진국이
될 기반을 닦는다는 것이다.(안행적 발전론)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이렇게 중요하다.

근대화는 상당기간 북위30도 내외에서 맴돌 것이다.

문제는 우리와 중국이다.

50년전에 우리보다 선진국이었던 중국이 인건비 10분의1로 맹추격하며
벌써 우리를 대신해 일본과 미국시장을 석권한다.

물론 개산주의가 성공하려면 선결과제가 많다.

그러나 우리를 곤경에 빠뜨릴 잠재력은 얼마든지 있다.

중국이 중진국이 되는 동안에 우리가 중진국으로 남아있으면 후진국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 빨리 개산국으로 나가야 한다.

그길을 열어주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그러나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다.

내년도 적자를 줄이라느니, 10퍼센트 경쟁력을 향상하라느니, 그것을 위해
내년부터 금융세제지원을 한다느니 등 슬슬 옛날식이 나온다.

명령지시로 되는 일이라면 아예 더 거창하게 나올 수도 있지 않은가.

"빨리 선진국이 되라"고 하든지 "손떼기 일 외에 정부가 할일은
없다"고 할 정도의 각오가 있어야 한다.

정치는 여전히 대권타령이다.

뜻 모를 말들을 툭툭 내뱉고 언론이 해설이다 특집이다하며 기를
돋군다.

대소 세력들이 윤무를 춘다.

근대화 타령이 이렇게 돌아가야 하는데 근대화의 물고를 터줘야
할 위인들이 제구실을 못하니 우울하기만 하다.

국민각자가 걸작품을 만들 수 있는 심잠한 분위기 속에서 우수한
작품에 대해 후한 상을 아끼지 않는 사회가 돼야한다.

또 모든 문제를 경쟁의 원리로 풀고 부정부패의 소지를 줄이는 정부가
요구되고 있다.

국민수준만큼의 정치를 넘을 수 없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악화가 양화를 계속 구축한다면 국민수준은 언제 올라갈
것인가.

구체적으로 기업은 언제 선진수준이 될 것인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제는 국민이 직접 이 운동에 나설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우리가 추구하는 시장경제란 결국 자본주의적 법치주의를 말한다.

요즈음 관심을 끄는 시민적 법치주의나 헌법경제학이 이를 뒷바침한다.

정부가 경쟁의 룰을 만들고 공정한 심판의 입장에서며 소비자인 국민이
이를감시하는 기틀이 마련돼야 한다.

법이 있되 엄정하게 지켜지지 않고 오히려 약육강식의 도구로 오용되고
있다면 이미 근대화는 글른 것이다.

연말에 우리를 더욱 불안케 하는 노사대립도 이해쌍방이 먼저 법을
지키는데서 그 해법을 찾아야한다.

법이 잘못됐으면 국회에서 고치도록 해야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