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점가에는 교수사회의 이면을 본격적으로 파헤친 풍자소설 한 권이
등장했다.

한국소설이 전공인 교수경력 18년의 계명대 민현기교수가 쓴 "교수들의
행진"이라는 현장 고발 소설이다.

이 소설은 박사학위 논문심사나 교수임용을 둘러싼 뒷거래, 돈 명예 성에
대한 교수들의 끝없는 탐욕, 연구나 교육보다는 학내정치에 몰두하는
지저분한 모습 등 작가나 들려주는 이야기는 일그러진 교수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대학의 참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속물근성과 허위의식에서 비롯된
교수들의 어둠속 얘기들을 밝은 햇살 속으로 끌어내 공개적으로 소독할
필요를 느꼈다"는 것이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라고 작가는 밝혀놓았다.

물론 그의 말처럼 교수들중에는 학문적 인격적으로 존경할만한 훌륭한
교수들도 많다.

그러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교수사회를 주도해 가는 것이 유감스럽게도
이들 "속물지성"이라는데 문제는 있다.

연작형태의 이 소설에서 작가는 대학생들의 은어를 통해 교수들의 행태를
통렬하게 풍자한다.

한두가지 예를 들면 "거지와 교수의 공통점 여섯가지"라는 질문형식의
풍자적 유머는 교수들의 속성을 매섭게 파헤치고 있다.

질문의 답은 이렇다.

첫째, 출퇴근 시간이 일정치 않다.

둘째, 항상 손에 무엇을 들고 다닌다.

셋째, 수입이 일정치 않다.

넷째, 남에게 얻어먹을 줄만 알지 남을 대접할줄 모른다.

다섯째, 되기가 어렵지 일단 되고 나면 어떻게든 밥은 먹고 산다.

여섯째, 전직하기가 매우 어렵다.

풍자는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돈이라면 오금을 못쓰는 교수를 돈과 페스탈로치의 합성어인 "돈타로치"
라고 부르고 "교수"를 교활한 짐승이란 뜻의 "교수"로 썼는가 하면 "교육"도
"교육"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학생들의 입을 통해 등장한다.

교수들을 거지와 동렬에 놓고 "교활한 짐승"이라고 까지 한 대학가의
통렬한 풍자가 대화속에 그대로 나오는 이 소설은 읽기조차 민망스러운
대목이 많다.

"풍자"라는 것은 본래 약간의 과장은 있게 마련이고 그래야만 경고가 된다.

그러나 작가는 이 소설에 폭로한 추악한 교수상은 엄연히 실재하는 우리의
현실이라고 강조하고 있으니 남는 것은 서글픔뿐이다.

"교수들의 행진"은 타락한 교수들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병들어가는 우리
대학사회의 이야기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학생에게는 스승이 없고 스승에게는 제자가 없는 이 비정상적인 학문
풍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얼마전 한 일본인 교수가 한국인교수들의 학생에 대한 무관심을 지적해
언론에 화제거리로 오른 적이 있지만 교수들의 연구나 사회봉사활동에 비해
학생교육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은 위험수위에 이른것 같다.

대학에서 교육기능 사라져 버린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어느 언론기관의 기자 입사시험에서 대학생활을 회고하는 작문시험을
치른적이 있다.

그 채점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놀라운 사실이 드러난다.

자기의 대학생활에 영향을 준 교수의 이야기를 한줄이라도 쓴 수험생은
단 한사람도 없고 모두가 오로지 동아리선배에 대한 감격적인 추억만을
늘어놓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교수의 역할을 취미나 이념 서클인 동아리의 선배가 대신하고 있고
대학에는 동아리활동을 하기위해 간 것처럼 표현해놓고 있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다시 신입생이 된다면 천편일률적으로 광범한 독서 해외배낭여행 사랑을
해보고 싶다고 털어 놓고 있더라는 이야기도 요즘 대학이 심어준 젊은이들의
가치관을 눈으로 보는 것 같아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이런 제자와 스승의 괴리는 꼭 변해버린 세태때문이라고만 해야할까.

"글 가르치는 선생은 만나기 쉬우나 사람됨을 가르치는 스승은 만나기
힘들다"는 말이 "한서"에 있다.

그리고 한퇴지는 "사설"에서 "스승이라함은 도를 전하고 업을 주고 의혹을
풀어주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모두 참스승이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다시 생각케 해주는
말들이다.

퇴계 이황은 368명이나 되는 제자를 길러낸 참 스승이었다.

그의 제자들중에서는 대제학이 10명, 상신이 10명이나 배출됐고 시호를
받은 인물만도 37명이나 된다.

그리고 전국각지에 제자가 없는 곳이 없었다.

제자들은 당시 심했던 동서의 파당도 초월했다.

그는 스스로 스승을 자처하지 않았고 제자들을 벗처럼 대했다.

그리고 제자의 학문정도에 따라 자상하게 "토론식강의"를 폈다.

특히 고봉 기대승과의 7년에 걸친 "4.7논변"은 퇴계의 참 스승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학문논쟁으로 남아있다.

"매번 이곳에 이르러 선생을 뵙거나 말씀을 듣노라면 다치 묵은 때를
씻어내는 것과 같고 꿈에 취하다가 깨어나는 것만 같네"

"그렇다네. 옛사람들이 구름과 안개를 헤쳐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가시밭
길을 다듬어 바른길을 낸다 하였다더니 바로 그와같은 심정일세.

어찌 힘써 노력하지 않겠나"

퇴계에게 수업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나눈 권호문과 유응견의 대화는
스승과 제자의 참다운 관계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현대의 대학에서는 교수와 학생간의 공동체적 유대감이 점점 약화돼가고
있다.

그것이 사라져감에 따라 대중화돼가는 학생과 전문화돼가는 교수사이의
거리는 자꾸 멀어져만 간다.

교수는 연구나 교육보다는 실용적 전문지식을 이용한 사회봉사활동에 더
바쁘다.

그 기회를 타고 "세미나 교수" "TV 준탤런트교수" "매스컴 단골교수"가
나타난다.

"언어의 상인" "지식의 상인"들이 활개를 친다.

그럴수록 학생은 더 외로워 진다.

대학의 기능은 시대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수의 기능은 교육과 연구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교수들의 행진"을 읽으면서 걱정스러웠던 것은 일부 타락한 교수들이기도
했지만 이런 교수밑에서 방황하는 학생들이었다.

"나는 바담풍해도 너는 마담풍 하라"는 논리는 더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