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명깊은 영화 한편을 보고 번역자를 떠올리는 사람은 드물다.

기껏해야 주연배우나 감독 정도일 것이다.

평범한 관객에게 수입된 영화는 미완성작에 불과하다.

번역자가 3~6일정도 매달려 "이해의 날개"를 달기 전까지는 그렇다.

영화가 얼마만큼 전달되느냐는 이들 손에 달렸다.

그래서 단순히 영상번역가가 아닌 "영상번역작가"로 불린다.

화려한 영상의 뒤편에서 일하는 이들의 토양은 척박했다.

고정적인 수입도 일거리도 없었다.

프로덕션과 방송국 PD들의 알음 알음으로 번역자를 수배하는 것이 이쪽의
생리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프리랜서로 뛴다.

간간이 들어오는 영화를 번역해서는 생계유지가 어려워 대부분 부업도
가진다.

일거리가 인맥을 통하는만큼 몇몇 알려진 번역작가에게만 일이 몰린다.

일정한 궤도에 오르기 전까지는 몇달이 가도 일거리 하나 맡기 힘들다.

번역의 대가도 기준이 없다.

아무리 비싼 영화라도 번역료는 한푼이라도 깎으려는 것이 이쪽 생리다.

열악한 여건탓에 영화가 좋아 뛰어들었다가 물러난 이도 헤아릴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러나 사정이 달라졌다.

케이블TV와 지역민방이 생기고 부터다.

기존 영상번역작가들만으로는 감당할수 없을 만큼 일거리가 많아졌다.

영화한편을 수입하면 최소한 세명의 영상번역작가가 필요하다.

극장 개봉영화의 자막과 비디오 자막 그리고 방송에서 성우의 입을 빌리는
더빙등의 형식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케이블TV 28개와 지역민방 4개 뿐만 아니라 이들의 일손을 필요로 하는
곳은 무궁무진하다.

대기업들이 잇따라 영상사업에 뛰어들고 있는 것도 고무적인 현상이다.

더구나 한국영화의 수출활로를 뚫기 위한 일환으로 역번역 작업도 늘고
있다.

방송국과 사설학원들이 앞다퉈 영상번역과정을 개설하고 전문 영상번역
회사가 생기는 것 등이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다.

얼마전까지 서적번역회사가 병행하던 영상번역이 하나의 전문직종으로
자라잡아 가고있는 것이다.

영상번역작가의 활동반경이 넓어진것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실력없는 영상번역작가의 오역이 판을 치게 되는 부작용도 낳았다.

과거에는 실력없는 영상번역가가 발을 붙일수 없는 여과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일거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일의 자유로움과 영상이 주는 매력으로 쉽게 이 직업에 뛰어든다.

사실 영상번역작가의 자격을 심사하는 어떠한 기관도 기준도 없다.

일거리를 맡게 되면 그때부터 영상번역작가이다.

그러나 영상번역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영상번역작가에게 요구되는 재능이 한두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외국어실력과 국어실력은 필수다.

영상의 장르마다 차이가 있지만 영상의 언어는 직역의 대상이 아니다.

영상번역작가가 아무리 정확하게 영화를 이해해도 관객에게 전달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제2의 창작이 요구되는 직업이다.

영화속의 문화도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못했을때는 어처구니 없는 오역이 발생한다.

해외유학파등 외국 생활경험이 있는 사람이 유리한것도 이때문이다.

속담 속어 사투리등을 한국화시키는 작업은 두개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했을때는 불가능하다.

영화비평력 섬세함 등도 영상번역작가가 갖춰야할 재능이다.

영화한편을 번역하는데는 적어도 3일이상이 걸린다.

영화가 지겹다 못해 징그러워질때쯤 작업이 끝난다.

이처럼 엄청난 인내력을 요구하는 만큼 보람도 크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관객이 느끼는 감동의 절반정도는 자신의
노력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손성태기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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