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생애는 핑계가 아니다.

바로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그것을 보상해 주는 상각이었다"

앙드레 말로 (1901~76)의 전기를 쓴 장 라쿠튀르는 그 책의 끝을 이렇게
몇마디의 시적 표현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행동하는 지성" "세기의 청년" "세기의 전설"로 숭앙받던 말로의 생애를
이처럼 간명하게 드러내주는 표현도 없을성 싶다.

말로에게 행동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죽음이라는 허무를 극복해 승화시키는
유일한 가치규범이었다.

또 그에게는 이것이 "미"로 통하는 길이기도 했다.

"정복자" "왕도" "인간의 조건" "희망" "모멸의 시대" 등 그의 대표작들은
한결같이 죽음의 극한상황과 대치해 그것을 초극하는 인간의 강인한 의지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인물을 그는 영웅이라고 불렀다.

그는 실제로 위험에 뛰어들어 생과 사를 넘나든다.

젊었을 때는 크메르왕국의 앙코르와트사원을 탐험, 불상을 떼어내
금고형을 받았다가 아내의 구명운동으로 겨우 풀려났다.

또 계속 그곳에 머물면서 베트남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을 돕기도
했다.

중국에 가서는 당시 공산당과 제휴하고 있던 광동의 국민당정권을 도왔다.

스페인 내란때는 수송기를 몰면서 공화파를 도와 싸웠다.

제2차대전이 일어나자 일등병으로 프랑스 탱크부대에서 싸우다가 포로가
됐다.

그리고 수용소에서 탈주해 레지스탕스운동에 앞장섰다.

이 무렵 말로는 드골과 만났다.

드골정권하에서 정보,문화장관을 역임했던 그는 재임시 프랑스의 문화를
되살리고 발굴하며 다음 세대에 알리는 일에 진력했다.

잿빛으로 변한 파리의 건물들을 한꺼풀 벗겨내 흰색이 되도록했고 지방
곳곳에 "청년문화회관"을 지어 젊은이들의 문화활동을 도왔다.

특히 그가 공해의 위협을 경고한 것이나 교육면에서 "인간성 도야"를
강조했던 점은 오늘날 큰 공감을 얻고 있다.

베리에르 르 뷔송에 있던 그의 유해가 20주기일인 지난23일 프랑스의
역사를 빛낸 위인 60여명이 묻혀 있는 파리의 팡테옹에 안치됐다고 한다.

11월을 "말로의 가을"로 정한 프랑스가 온통 그를 기념하는 문화행사로
떠들썩하다는 소식도 들린다.

현지에서는 "프랑스의 영광"을 재연해 보겠다는 집권층의 속뜻
때문이라는 비판도 있는 모양이지만 말로는 작가로서,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때로는 미래를 꿈꾸는 탐미주의자로서 세계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임에
틀림없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