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용 <홍익대 교수 / 경제학>

최근 우리 경제가 전반적인 침체국면에 진입하면서 경제성장의 원동력인
지식과 인적 자본의 생산에 경제학자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리고 지식과 인적 자본의 역할이 강조되면서 지식을 생산하고 인적
자본의 형성을 담당하는 교육제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특히 고급지식의 생산을 담당하고 있는 대학교육기관을 효율화시키는
문제가 국가적인 관심사로 등장하고 있다.

문민정부가 교육개혁을 주창하면서 대학교육의 효율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단순히 대학입시의 문제점을 풀기 위해 대학교육이 정상화되야
한다는 단순한 시각보다는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지식을 생산하는
대학교육의 효율성 제고가 시급하다는 또 다른 시각이 그 배경에 깔려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대학을 효율화하는 것인가?이와 관련해 최근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는 주장이 "대학에 주인 찾아주기"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마치 주인없는 기업에 무사안일과 비능률이 판을
치듯이, 대학이 집단이기주의와 퇴영적인 사고에 물들어 있는 이유는
대학에 확실한 주인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대학을 효율화하기 위해서는 대학에 확실한 주인을 찾아주어
이 사람이 책임지고 대학을 경영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인없는 기업의 비능률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주장은 명쾌하기
그지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얼핏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이같은 주장은 사실상 정곡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주장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의 대학을 진정으로 효율화하기 위해서는 이같은 오류에 가득찬
주장을 청산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우선 이 주장은 현실의 증거와 상치된다.

우리나라 대학교육의 70% 이상을 담당하는 것은 사립대학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립대학에는 확실한 주인이 존재해 왔다.

소위 교주라는 것이 그것이다.

대학의 실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어느 대학은 아무개의
소유라는 것을 쉽사리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상당수의 대학에 확실한 주인이 이미 존재해 왔던 상황에서 대학에
주인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대학이 이처럼 낙후됐다는 진단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우리나라 사학중 명문이라고 손꼽히는 대학에는 교주라는 존재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이 주장은 경제이론에 비추어 보아도 역시 설득력을 결여하고
있다.

1991년과 1993년에 각각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로널드 코즈와 더글러스
노스는 거래비용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회제도의 경제적 의미를 설명한
학자로 유명하다.

이들에 의하면 현실세계에는 여러가지 다양한 거래비용이 존재하는데
이같은 거래비용을 줄이는 하나의 수단이 제도라는 것이다.

예를들어 기업이라는 제도는 시장거래를 활용하는 데 따르는 거래비용을
줄이는 하나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즉 때로는 계약에 의존하는 시장거래보다 명령과 감독, 그리고 조정 등과
같은 기업내의 활동이 더 간편하기 때문에 기업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제도경제학자의 이론에 따르면 대학은 대학내에 존재하는 여러
거래비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제도가 형성돼야 가장 효율적인 제도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대학내에 존재하는 거래비용이란 무엇이며 이를 줄일 수 있는
제도라는 것은 무엇인가.

과연 대학에 확실한 주인을 만들어 주고 이 주인이 배타적인 경영권을
행사하는 것이 최선의 제도인가.

이같은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대학내에서 행해지는 활동 즉 지식의
창조와 인적 자본의 형성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 어떠한 여건이
필요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새로운 지식의 창조는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만
가능하다.

명령과 조건이라는 기업 특유의 수단은 지식의 창좌에 도움이 되기
보다는 오히려 자유정신을 억압한다는 점에서 지식의 창조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방법보다는 지식생산자의 생산의욕을 고취하고 동기를 유발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인적 자본의 형성을 위한 교육 역시 마찬가지이다.

교수에게 교육의 방향을 제시하고 교육을 잘 하라고 명령한다고
해서 훌륭한 교육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훌륭한 교육은 감시와 명령을 통해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교수와
학생의 자발적인 유인에 의해 더 잘 달성될 수 있다.

결국 기업조직은 대학교육을 효율화하는 데 적합한 조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설사 확실한 주인을 찾아주는 것이 효율적인 기업을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일지는 몰라도 그것이 훌륭한 대학을 만드는 왕도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대학구성원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민주적인 제도가 오히려
기업조직보다 대학에 더 적합한 제도일 가능성이 크다.

이제 다시 입시철이 돌아왔다.

아마도 앞으로 몇 달 동안 전국의 많은 고3 학부모는 또 한 번 무던히도
추운 겨울을 경험할 것이다.

국가발전이라는 거창한 명제는 접어두고 그들의 애틋한 심정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어서 빨리 우리나라의 대학제도가 민주적인 방향으로 개편되어
그들의 아들 딸들이 훌륭한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