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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자전환의 명수" "흑자 메이커" "경영 정상화의 귀재"

"야전 침대 사장" "노사해결사" "불도저 안"

쌍용제지와 쌍용중공업 한국중공업의 사장을 지낸 안천학씨(61)를 일컫는
닉네임들이다.

쌍용그룹에서 잔뼈가 굵은 안 전 사장은 지난 82년 쌍용제지 사령탑에
오르면서부터 경영 혁신의 신화를 낳기 시작했다.

임직원은 물론 가족들까지 영업활동에 동참케 하는 "총력 경영"을 펴고
사장실에 야전침대를 깔아 하루 14시간씩 근무하기도 한 그에겐 허약한
기업, 안이한 사원은 존재할수 없었다.

쌍용제지를 소생시키고 만성 적자이던 쌍용중공업을 일약 흑자기업으로
바꿔놓은 그에게 정부도 마침내 소임을 부여했다.

90년에는 당시 침몰해가던 한국중공업의 정상화 책임을 맡았다.

누적적자가 4천7백20억원이던 한중은 그가 경영을 맡은지 1년만에 7백86억
원의 순이익을 내고 91년을 흑자 원년으로 기록했다.

93년 한중의 경영에서 손을 떼며 캐나다 벤쿠버로 건너간 그는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UBC) 경영대학원 교수로 또 한번 변신을 시도했다.

이어 지난해에는 UBC의 명예법학 박사학위까지 받아 세인을 주목을 끌었다.

최근 일시 귀국해 모처럼 여유를 누리고 있는 그를 본사 김기웅 산업1부장
이 문정동 패밀리아파트 자택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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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입니다.

캐나다에서는 언제 돌아오셨나요.


<>안천학 전 사장 =한달쯤 된 것 같군요.

벤쿠버가 살기에 무척 좋은 곳이긴 하지만 겨울엔 비가 자주와요.


-한국에서도 여전히 바쁘시지요.

<>안사장 =사람들도 만나고 여러가지 생각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두드러진 변화는 제가 바둑에 입문했다는 것입니다.

밤늦게까지 바둑채널 CATV를 보고 책도 읽으면서 바둑을 연구합니다.

친한 친구와 어울려 하루에 여러판의 실전도 하고요.

그래서 입문 한달 남짓만에 7~8급의 실력이 됐는데 남들이 모두 "장래가
보인다"고 합디다.


-믿어지지 않는 빠른 향상이시네요.

골프를 처음 배우실 때도 신동이란 소리를 들어셨다지요.


<>안사장 =젊었을 때 이야기지만 골프도 6개월만에 싱글을 쳤습니다.

아마도 제가 무엇을 한다면 그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 그런가 봅니다.


-캐나다에서는 밴쿠버의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UBC)에서 강의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주로 어떤 내용을 강의 했습니까.

<>안사장 =실물경제와 기업경영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MBA(경영학석사) 과정의 교수를 맡았기 때문에 학생들이 궁금해하는
기업실무에 대해 주로 강의했지요.

예컨대 기업 감사는 어떻게 하고 생산성은 어떻게 관리하느냐는 것들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특히 내가 실물경제를 익혔던 사람이니까 구체적인 경험담을 들려달라는
요구가 많았습니다.


-지난 5월엔 UBC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도 받으셨는데.

<>안사장 =그렇습니다.

제가 받기전에도 구평회 무역협회 회장과 조완규 전 서울대총장 같은 분이
이곳에서 학위를 받으셨더군요.

개인적으로도 큰 영광이었습니다.


-비학계 출신으로 3년만에 교수가 되고 박사학위까지 받은 건 이례적인 일
아닙니까.

<>안사장 =아주 드문 일이라고 하더군요.

아마도 내가 사원부터 출발해 최고 경영진에 올랐고 한국중공업이라는
거대한 국영기업체 사장까지 맡아 정상화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인정받았던
것 같습니다.


-UBC에도 특별히 기여하신게 있었나요.

<>안사장 =글쎄요.

최고경영자과정 개설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을 들수 있겠네요.

147명에 이르는 여유있는 교수진이 연구하다 남는 시간이 있으면 대학수익
을 위해서 최고경영자과정 강의를 할수 있지 않겠느냐고 학장에게 한 얘기가
수용됐던 겁니다.

결국 경영대학원내 최고경영자과정이 신설돼 캐나다 국내외의 경영자들을
받았고 이것이 대학의 재원 마련에 보탬이 됐다고 합니다.


-아무리 교수로서 변신하셨다 해도 그래도 사람들은 안사장님을 기업인
으로서, 전문경영인으로서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오랜 기업생활중 가장 기억에 남는 시기는 언제입니까.

<>안사장 =아무래도 첫 직장이자 가장 많은 기간을 보냈던 쌍용시절
입니다.

쌍용은 일찌기 시멘트 등 국가 기간산업에 손을 댔기 때문에 영업이나
거래를 하기 편한 위치였지만 나는 그런 유리한 조건을 거부했습니다.

젊은 몸을 밑천으로 몸돌보지 않고 열심히 뛰었습니다.

지금도 60년대 후반 사우디 아라비아에 시멘트 수출하러 출장갔을 때가
기억납니다.

나는 그때 모시적삼에 고무신신고 출장갔습니다.

그네들에게 "여러분들도 전통적인 하얀 옷차림을 하듯이 우리도 이런
문화를 갖고 있는 국민이다"는 것을 말해줬습니다.

양복입고 파는 것보다 결과가 훨씬 좋았습니다.

그런 옷차림과 정신으로 한국 사람들에게는 전인미답이었던 사우디 오만
쿠웨이트 카타르 이락 이란 UAE 등지로 뛰어다녔습니다.

그때야말로 우리 시멘트를 수출해야겠다는 투지에 충만했고 회사와 국가를
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려운 줄은 조금도 몰랐습니다.


-처음 사장이 된 것은 쌍용제지였지요.

<>안사장 =그렇습니다.

쌍용제지 사장이 되기 전에 나는 쌍용시멘트의 영업담당 상무였습니다.

그땐 시멘트 세일은 앉아서 해도 될 정도로 물자가 귀했고 쌍용의 지위도
막강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셀러즈 마켓 상황이라해도 고객에겐 찾아가 절하고
고마워하며 파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쌍용제지 사장을 맡으면서는 임직원들의 정신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직원들은 "아무리 화장지 회사에 다니지만 남자가 그런
것을 어떻게 직접 팔러 다니느냐"며 영업하는 것을 부끄러워했던게 현실
이었습니다.

그러니 마켓 셰어가 늘어나지 못할 밖에요.

그런 고정관념을 타파하는게 나의 첫 작업이었습니다.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안사장 =쉽지는 않았지만 불가능하진 않다고 믿었습니다.

우선 저부터 매일 저녁 자동차에 한 박스씩 화장지와 티슈 등을 싣고와
집사람과 딸들을 불러 의무적으로 팔게 했습니다.

집사람이 매일 화장지 박스를 이고 팔러 다니다 가벼운 상처를 입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장이 팔러다니니까 중역들도 동참했습니다.

결국 분위기가 달라지며 임직원들도 명동에 나가 화장지 두루마리를
선전하는 등 공격적인 영업을 폈습니다.

판매가 급신장된 건 두말할 것도 없었지요.


-다른 일화도 참 많더군요.

<>안사장 =현대시멘트와 얽힌 얘기가 하나 있지요.

당시 쌍용은 연간 1,000만t 생산규모를 갖춘 최대 시멘트기업이었고
현대시멘트의 연산규모는 쌍용과 90만t 정도에 불과했는데 두 회사는 별로
친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쌍용 사람들은 현대와의 거래같은 것은 기대조차 하지
않았지요.

그랬지만 나는 현대시멘트 정순영 회장을 찾아가 쌍용제지가 생산하는
시멘트용 크라프트지를 구매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드렸습니다.

저의 자세를 기특하게 보셨는지 정회장께서 거래를 허락, 모두 50만t을
팔았습니다.

지금도 정회장님은 스케일이 있는 훌륭한 기업인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쌍용중공업 사장으로는 어떻게 옮겨가게 됐습니까.

<>안사장 =그룹내 중공업은 당시 경영이 부실해 골치거리였습니다.

마직막으로 내게 맡겨 잘되면 하고 안되면 포기하자는게 그룹의 판단
이었던 것 같습니다.

창원공장 현장에 내려가보니 포기할 상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상황을 파악한뒤 사장실을 공장으로 옮기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해 이사한 날이 마침 5월5일 어린이날 이어서 사원들한테는 미안한 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사원 자녀들에게 필통을 사준 기억이 나는군요.

그렇게 시작해 8년을 죽기 아니면 살기로 매달렸습니다.

다행히 좋은 결과가 나와 해외기술제휴 업체가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미국 카민즈 엔진과 덴마크 B&W 등이 도움을 많이 줬습니다.

창원 공장에 덴마크 왕국 여왕 남편이 찾아올 정도로 관계도
돈독해졌습니다.

그 결과 84년도엔 쌍용이 제작한 엔진을 일본업체가 수입해 선박에 탑재할
정도로 기술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쌍용중공업에서 한국중공업 사장으로 옮겨오셨지요.

당시 저는 상공부를 출입했는데 안사장님은 부임초기부터 신화를 만들어
내시더군요.

<>안사장 =그랬지요.

부임할때 얘길 하나 할까요.

상견례 때 80명의 노조원들로부터 소주 한잔씩, 80잔을 받아 마시고 인사
한마디한뒤 그냥 고꾸라졌습니다.

노조원들이 날 업고 실어 날랐지요.

그랬으니 모두들 그 다음날 내가 출근을 못할 것이라고 장담했는데,
웬 걸, 난 끄떡없이 출근했습니다.


-그런 의지력이 한국중공업 경영 정상화의 요인이 아니겠습니까.

<>안사장 =여러 사람의 응집된 힘이 정상화의 원동력이었다고 봅니다.

회사의 기구한 운명 때문에 한이 많았던 직원들을 잘 단결시켜 엄청난
힘을 발휘할수 있었던 것은 사실 행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응집력을 바탕으로 80년대말엔 산업계에 몰아닥친 노사분규 파동에도
한중은 끄떡없었습니다.

뒤에 안 이야기지만 내가 한중사장이 된 큰 요인 중 하나가 한중의 노조가
쌍용중공업의 안사장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관계당국에 많이 했다고
합디다.

어쨌든 한중으로 와서 3년을 지냈는데 어찌나 바빴던지 3개월을 지낸
기분이 들 정도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나저나 지금 우리 경제가 어렵다고들 걱정이 대단합니다.

안사장님은 우리 경제의 현실을 어떻게 진단하십니까.

<>안사장 =수입이 많고 수출이 적어서 어렵다고들 하더군요.

그런데 어렵다는 것은 곧 재도약의 기회가 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분명 또한번 도약할수 있습니다.

경제는 사이클이 있으니까 올라갈 때가 있으면 떨어질 때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너무 비약해서 현실이 어렵다고만 탄식할 것은 없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후배 경영인들에게 한마디 해주시죠.

<>안사장 =한가지만 말하겠습니다.

경영에 책임을 지는 관리자라면 자기몸을 사리고 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가정보다는 회사를 더 중시해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회사가, 국가가 있어야 가정과 내가 있는 것입니다.

요즘엔 내가 있고 가정이 있어야 회사와 국가가 있는 것으로 개념이
바뀌어버렸어요.

이런 뒤집어진 의식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부뚜막에 있는 소금도 집어 넣어야 짜다는 옛말처럼 누가 나서서 소금을
집어넣는 역할을 해줘야 합니다.

< 정리=심상민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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