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한 결혼은 안하느니만 못하다.

주변의 반대를 무릅쓴 결혼은 그 후에도 삐그덕거릴 수 있다.

인간관계를 회복하는데 시간도 많이 걸린다.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다.

대우와 톰슨의 결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프랑스 간판전자업체가 동양의 "황색 폭격기"에 격추돼 시집가야 하는
운명에 놓인 것이 모국입장에선 반가울리 없다.

급기야 프랑스 국회에 이 문제가 상정되기에 이르렀다.

정부도 국민 여론을 의식, 톰슨의 대우행은 "민영화 위원회"에서 결정될
것이라는 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현지의 텃세가 너무 심하다.

이런 상태로는 인수하더라도 당초 예상보다 더 큰 부담을 안게 될지
모른다.

어렵게 결혼하더라도 불협화음은 계속될 것이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이혼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은 일본의 예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항상 기록적인 가격에 해외기업을 사냥했지만 헐값에 되팔아 넘길 때가
많았다.

록펠러센터는 다시 미국인의 손에 넘어갔고, 마쓰시타가 사들였던 헐리웃
영화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문화적 차이의 장벽을 극복하지 못한채 사람과 돈을 계속 대는 것은
"밑빠진 독에 물 붓기"에 다름 아니다.

뒤늦게 깨달은 교훈이었다.

그런데도 한국은 여전히 "브랜드"가 주는 이미지에 이끌려 쓰러져가는
기업에 눈을 돌리고 있다.

한국기업들이 사냥해 놓은 해외기업은 "상처뿐인 영광"의 기업들이 많다.

삼성전자가 인수한 AST가 그렇고, LG전자가 사들인 제니스 또한
마찬가지다.

LG는 엄밀한 의미에선 제니스의 농간에 걸려든 것이라는게 해외기업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LG가 제니스 인수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자, 95년 4월 초조해진
모슈너(당시 제니스 회장)는 한 일본기업이 인수조건을 제안했다고 LG에
거짓 통보했다.

LG는 자칫 제니스를 놓칠 것 같은 압박감과 컨설팅업체인 매킨지의
충고에 따라 제니스를 인수한 것이다.

"뚜쟁이"들의 술수에 넘어가게 됐다는게 현지에서 공공연히 떠도는
얘기다.

이렇게 인수한 제니스는 지금 "애물단지"가 돼 있다.

적자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올 3분기에만 4천만달러 이상의 손실을 빚었다.

삼성이 인수한 AST도 "계륵"이 돼 있기는 매한가지다.

경영진을 계속 바꾸는데도 경영방식의 차이와 문화의 벽을 넘지 못해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일본기업들이 빠져나간 사냥터에서 적자덩어리 "장년"기업인수에 시간과
돈을 쏟아붓고 있다는 평가가 나올만하다.

우리는 이제 일본기업들의 사냥감과 사냥터가 달라졌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그들의 사냥대상은 세운지 몇년 안된 풋내기 첨단업체로 바뀌었다.

주된 사냥터는 미 실리콘 밸리.

도시바, 미쓰비시, NEC 등 유수한 일본기업들중 실리콘 밸리에 투자하지
않는 업체는 없다.

신종 황금사업으로 각광받고 있는 "교육적 오락"사업과 "네트워킹"기업이
주요 타깃이다.

변화를 포착하는 것은 기업들의 몫이다.

실리콘밸리가 세워놓은 기준에 따라 전세계 첨단시장이 움직이는 시대가
곧 도래한다는게 일본기업들의 시각이다.

그래서 그들은 미련없이 떠오르는 "샛별"을 잡으러 오늘도 실리콘밸리로
뛰어들고 있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는 있지만 자금이 부족한 실리콘 밸리 창업기업을 잡는
것은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길이다.

한국재계의 적자기업인수 뒤에도 물론 충분한 "논리"는 있다.

유명브랜드와 기존 판매망을 손에 넣겠다는 계산이다.

한.일 양국의 전략이 일맥상통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엔 결정적 차이가 있다.

한국기업이 당초의 시장제패를 목표로 "현재형" 기업인수에 매달리는
동안 일본기업들은 벌써 "미래형"으로 포커스를 옮겨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우리기업들도 국제화시대에 걸맞는 파트너를 신부감으로 맞아들여야
할 때가 됐다.

"빛좋은 개살구"를 덥석 물었다간 빼도박도 못한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전체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 얘기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