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구, 마님, 제가 입을 잘못 놀렸습니다.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희봉의 성깔을 아는 왕아인지라 일단 싹싹 빌었다.

"홍아란 놈은 대감님 출장 가는 길에 따라가지 않고 어쩐 일로 우이저의
집에 있단 말이야. 당장 그놈을 데려와"

"네, 네"

왕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물러나 급히 홍아를 불러 왔다.

홍아가 흘끔흘끔 희봉의 눈치를 살피며 주눅이 든 채 발끝으로 마당의
흙을 문질러대고 있었다.

"네 이놈, 하인인 주제에 주인이랑 잘들 놀아나고 있구나"

희봉이 우이저의 일을 캐어물을 줄 알았는데 주인 대감과 놀아나고
있다고 책망을 하다니. 홍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주인 대감님은 남색 같은 것은 하지 않으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이놈아, 대감님과 남색질을 했다고 너를 꾸짖고 있는 것이 아냐.

왜 대감님이 우이저와 새살림을 차렸는데도 나한테는 숨기고 너희들끼리만
놀고 자빠졌느냐 이 말이야.

일의 자초지종을 낱낱이 실토하지 않으면 곤장을 못 면할 줄 알렷다"

희봉이 앙칼진 목소리로 다그치자 홍아는 이마를 땅에 대다시피 하며
가련이 우이저를 첩으로 들이게 된 경위를 고해바치기 시작했다.

희봉이 예상한 대로 가련의 요청에 의하여 시아주버니 가진과 그
아들 가용, 큰동서 우씨 들이 짜고 은밀하게 성사시킨 일이었다.

그런데 희봉은 홍아로부터 우이저를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는 좋은
단서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우이저가 가련의 첩으로 들어오기 전에 장화라는 남자와 정혼한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가진이 우씨와 우이저의 어머니,그러니까 장모에게서 돈을 받아 장화의
아버지에게 건네주고 파혼장을 쓰게 하였는데 당사자인 장화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일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홍아가 그런 세세한 것들까지 고해바치자 희봉은 홍아에게 벌을
내리지 않고 그냥 돌려보내었다.

홍아가 물러간 후 희봉은 평아를 다시 불러들여 남편 가련에 대해
욕을 바락바락 해대며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내었다.

"평아야, 이런 억울할 데가 있나.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개라도 이런 식으로 암컷을 넘보지는 않을거야.

내 남편이라고 하는 작자는 개새끼보다 더 지저분하고 게걸스러워.

그 주제에 오륙품의 품계가 가당치도 않지.

흥, 이번에는 내가 가만 놔두나 봐라.

두 연놈들이 사람들 앞에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만들어 놓고 말
테니까"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