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8개월의 몸으로 섭씨30도를 웃도는 불볕을 견딘 지난 8월이
마치 악몽과 같다.

춘천인형극제와 수원성국제연극제 참가, 그리고 홍성에서 열린
"만해제" 준비로 피서철 열차의 북새통속에서 돌아다녔다.

이러다가 아기가 "엄마, 나 힘들어"하고 나오지나 않을까 잔뜩 걱정도
됐다.

오죽했으면 산부인과의사로부터 "어떻게 했길래 임산부몸무게가
1개월째 1kg도 안늘었느냐"는 얘기를 다 들었을까.

그러나 이런 고생도 허사.

어이없게도 춘천 공연이 취소됐다.

단원 모두가 몇달을 준비한 이 공연은 한국에서는 처음 시도한
야외인형극이었다.

사람과 인형이 함께 하는 야외극으로 공연에 쓰이는 소품만 해도
2톤트럭 가득 분량이었다.

인형과 특수장비 등 많은 면에서 심혈을 기울인 공연이었다.

춘천에서 해마다 열리는 이 국제인형극제는 이제 명실공히 국제적인
연극제로 자리잡았고 그 공신력을 믿었기에 운송비와 숙식 제공의 적은
혜택만으로도 19명의 배우와 6명의 스탭들은 즐겁게 춘천으로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공연장인 H대학에 여정을 풀고 무대설치를 하려 하니
학교관계자라는 사람이 와서 공연을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주최측에게 현지 섭외를 맡긴 만큼 모든 공연조건이 완비된
줄로 알았다.

주최측도 당황했는지, 부랴부랴 학교측에 알아보았지만 완강하기만
했다.

더욱이 그 이유가 공연장으로 쓰일 장소가 의과대 실습실이 있는
곳이어서 실험용 동물이 음향이나 조명 등에 놀라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실험용 동물이란 다름아닌 몰모트 몇마리였다.

우리는 공연이 그 동물에게 그다지 해가 되지 않으며 관객들과
약속이 돼있어 반드시 공연해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결과는 풀었던
짐을 고스란히 다시 싸는 것이었다.

고생하며 공연을 준비한 우리 단원도 단원이지만 서울에서 그 공연을
보러온 관객들의 헛수고는 어떻게 해야 하나.

자신의 소유물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태도가 야속하기만 했다.

비슷한 일이 수원에서도 생길 뻔했다.

이번에는 주최측이 공연장소와 스케줄을 우리와 단 한번의 상의도
없이 바꾸려는 것이었다.

그 이유라는게 우리 공연시간에 TV문화프로그램을 촬영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공식공연을 취소하고라도 매스컴을 한번 타보겠다는 주최측의 생각도
그렇지만 자기시간에 맞춰 리허설을 해달라는 방송국의 비상식적인
요청도 참으로 딱할 뿐이었다.

결국 이틀간의 데모겸 협상이 있고서야 예정대로 공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 끝에 리허설도 없이 하게돼
우리로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가.

언제까지 우리 공연문화는 이런 수준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사실 이번 사건들은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었지만 우리
공연계를 둘러보면 너무나 많은 비상식적인 일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

특히 함께 문화예술을 책임질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비문화적인 태도는
아직 할일 많고 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은 젊은 예술가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산이 아닐 수 없다.

경제불황의 깃발을 들고 기업들은 내년도 문화예술분야의 지원을
대폭 줄인다고 하고 정부의 내년도 문화예산도 올해보다는 다소
늘어났지만 전체예산의 1%수준미만에 머물러 있다.

들려오는 이런저런 얘기들로 우울해지지만 누가 하라고 등떠밀지도
않았는데 "내일은 좀 나아지겠지"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애쓰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희망을 걸어본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