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력이 모든 것을 좌우했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시대는 지나갔다.

소비자들의 욕구가 급속도로 세분화 개성화되면서 이제는 다품종 소량생산
시대를 넘어 소비자 개개인의 욕구를 중시하는 고도의 마케팅을 요하는
때이다.

생산방식과 마케팅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유통채널의 변화를 수반한다.

이제 단순히 많은 유통망의 확보가 판매력의 척도가 되지 못한다.

소비자들의 요구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유통채널만이 살아남을수 있는
시기가 온 것이다.

국내 유통업계에서도 제조업체의 직속기구와 다름없는 대리점체제가 차츰
힘을 잃고 생산과 판매가 분리되는 소비자 지향적 유통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대중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자동차 가전 의류 화장품 등 주요
제품별로 유통경로의 이같은 변화를 진단한다.

[[[ 가전 ]]]

가전제품 유통채널 변화의 흐름은 기본적으로 "대리점체제의 붕괴-양판점의
득세"라고 말할수 있다.

국내 가전제품은 삼성 LG 대우 등 가전3사의 강력한 주도아래 각 제조업체
에 소속된 대리점들이 해당 메이커제품만을 판매하는 폐쇄적인 대리점체제를
고수해 왔다.

제조업체가 주는 상품을 정해진 가격에 판매하는 대리점 사이에 가격경쟁
이나 상품구색 경쟁은 원천적으로 봉쇄돼 있다.

어디를 가나 같은 가격, 같은 상품이다.

따라서 소비자들의 선택권 또한 제한된다.

특정 메이커의 특정제품을 미리 지정하고 찾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개는
가까운 가전숍에 가 있는 것 중에서 고르게 마련이다.

당연히 가전사의 판매성적은 제품력이 얼마나 우수한가보다 얼마나 많은
판매망(대리점)을 확보했는가에 좌우되게 된다.

제조업체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이같은 대리점체제에 90년도를 전후해
반발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바로 하이마트, 전자랜드21과 같은 가전양판점과 프라이스클럽 킴스클럽
등 할인점 등장이다.

여러 메이커 제품을 한 곳에서 취급하는 양판점은 독립적인 유통업체로서
어느 한 제조업체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

판매추이에 따라 브랜드에 관계없이 소비자들이 원하는 상품을 갖다
놓으면 된다.

양판점이 늘어나면 고객을 끌기 위한 양판점간의 가격및 서비스 경쟁도
치열해진다.

제조업체의 관리를 받지 않는 양판점들은 당연히 소비자의 기호에 최우선적
으로 맞춰 발빠르게 움직이게 된다.

실제로 가전랜드 21은 현재 직영매장을 11개로 넓히고 연매출 1,400억원을
올리는 등 고객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하이마트도 설립 7년만에 200평이상 대형매장을 18곳으로 확대했다.

물론 현재 양판점의 처지가 그렇게 승승장구인 것만은 아니다.

자사 대리점을 보호하려는 국내 가전사들이 양판점이나 할인점으로의
상품공급을 거부하고 있어 상품물량 대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소비자요구를 수용하기에 적합한 양판점으로의 유통채널 이양은
시대의 흐름이다.

가전 3사들이 경쟁력이 떨어지는 소규모 대리점을 줄여가고 상품을 확대한
대형대리점을 확보하는데 힘을 기울이는 것도 다가올 양판점 전성시대를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볼수 있다.

[[[ 의류 ]]]

한국사회에서 택에 붙은 권장가대로 값을 치르고 옷을 사는 사람은 팔푼이
취급을 받는다.

백화점에 가보면 깨끗하게 진열된 대부분의 의류매장들이 텅 비어 있는
반면 이월및 재고상품을 파는 좁다란 행사매장은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이같은 기현상은 왜 일어날까.

우리나라의 의류유통이 근본적으로 잘못돼 있기 때문이다.

국내 의류업계는 대량생산-고가-재고발생-세일의 악순환이 계속돼 왔다.

정확한 수요예측 없는 대량생산은 재고에 대한 부담으로 권장가를 높일수
밖에 없다.

여기서 남는 재고를 다시 30~70%까지 할인하는 밀어내기식 바겐세일로
해소하는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의류대리점들이 소규모 매장에 단일브랜드만 취급, 재고
부담및 리스크가 높은 것도 가격상승에 한 몫을 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류유통은 제조업체의 체계화되지 못한 생산과 빈약한
판매망이 맞물려 후진적인 구조를 벗어나지 못해 왔다.

그러나 적정가격에 다양한 선택을 요구하는 소비자들의 욕구가 높아지면서
최근 2, 3년사이에 의류유통에 급격한 채널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선진의류유통으로 가는 징후로 바로 1년내내 적정가격에 팔겠다는 노(NO)
세일브랜드의 확산과 여러 브랜드를 함께 판매하는 멀티브랜드숍의 번창을
꼽을수 있다.

"파크랜드" "빈폴" "엠비오" "나이스클랍" 등이 정상판매율을 높이고
세일을 자제하는 노세일판매로 호응을 얻고 있으며 한일합섬 신원 나산 등
대부분의 의류업체들도 이같은 추세로 나아가고 있다.

브이익스체인지 챌린지 한섬FX 등 여러 업체의 다양한 브랜드들을 통합한
패션멀티숍과 상설아울렛의 대거 등장도 소비자들의 편의를 향상시키는
소비자 지향적 유통흐름을 보여주는 것이다.

[[[ 자동차 ]]]

한국의 자동차유통은 신차의 경우 최근까지도 "유통"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90년도까지 국내 자동차판매는 현대 대우 기아 쌍용 등 각 자동차메이커
들이 지역마다 설립한 영업소에서 전담해왔다.

본사에서 직접 운영하는 각 영업소에는 다수의 영업사원들이 딸린다.

이들은 본사직원으로서 판매량에 따라 일정액의 수수료를 받는다.

사고 파는 중간 유통과정이 없이 바로 본사와 소비자가 영업사원이라는
대리인을 통해 직접 만나는 직판체제가 국내 자동차 판매루트의 전부였다.

이처럼 생산과 판매가 결합되면 여러가지 부작용이 생기게 마련이다.

제조업체로 힘이 집중된다.

업체는 업체대로 전국에 걸친 판매망 운영과 관리에 상당한 비용부담을
안게 된다.

따라서 미국딜러 일본 등 선진국의 경우 제조업체로부터 차를 사들이고
일정액의 마진을 붙여 판매하는 딜러(대리점) 제도가 일찍부터 발달했다.

나아가 여러 업체의 차종을 딜러의 판단에 따라 구입해 판매하는 혼합
판매가 이미 자리잡고 있다.

국내에서는 91년 대우가 국민차 티코의 대리점을 공개모집, 처음으로
업계에 딜러제가 도입되면서 자동차유통에 변화가 일기 시작됐다.

대우가 티코대리점의 모집동기로 <>투자비가 적게 들고 <>일시에 많은
판매망을 확보할수 있으며 <>지역관리가 수월하다고 설명한 것처럼
제조업체가 스스로 판매망관리에 부담을 느끼고 능력있는 딜러에게 판매를
전담하게 한 것이다.

뒤이어 기아도 400여개의 대리점을 모집하고 대우도 부산 대구 등 지방
에서부터 개인사업자에게 판매권을 이양하는 등 자동차판매에서 시장의
자율성이 커지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 대리점간 가격경쟁과 한 대리점에서 여러 차종을 판매하는
혼합판매는 업계 계약상 길이 막혀 있지만 결국 개인딜러와 대리점들이
자유경쟁하는 오픈마켓으로 갈수 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 화장품 ]]]

국내 화장품유통은 현재 단순히 A에서 B로 유통채널이 변화한다기보다
A에서 A B C D로 유통경로가 다양화되는 길을 밟고 있다.

80년대까지 국내 화장품의 90% 이상이 소위 코너점이라 불리는 화장품
전문점에서 판매됐다.

그러나 제조업체들의 밀어내기식 덤핑판매와 터무니없는 권장가표시,
이에 따른 코너점들의 할인경쟁 등으로 유통질서가 문란해지면서 결국
제조업체의 수익성은 떨어지고 소비자들의 불신이 높아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같은 유통질서 문란이 심화되면서 화장품 업계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오픈 프라이스제" 도입을 추진, 올 12월께면 실현될 예정이다.

제조업체가 붙이는 권장소비자가격을 아예 없애고 유통업자의 자유권한으로
가격을 결정하는 오픈프라이스제가 도입되면 제조업체의 지나친 덤핑공세와
코너점들의 과다할인율 경쟁이 없어지고 가격은 자연스럽게 소비자가 납득
하는 적정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화장품업계는 또 이같은 합리적인 가격제도 개선외에 방문판매 슈퍼마켓
양판점판매 등 다양한 유통망을 개척해 판로를 넓히고 있다.

판매원의 상담과 제품안내를 통해 고가제품 수요층을 공략하는 방문판매,
용기및 광고의 거품비용을 뺀 실용적인 슈퍼마켓용 화장품 등 판매경로가
코너점을 탈피해 다양화되고 있다.

태평양이 라네즈 마몽드 아모레 미로 등 기존브랜드 외에 최근 방문판매
브랜드 헤라 프리메라 고아 베스카인, 슈퍼용화장품 쥬비스를 내놓는 등
차별화된 제품을 개발하는 것도 고객들의 욕구와 취향에 따라 세분화되는
유통채널에 대응하려는 노력으로 볼수 있다.

< 권수경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