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7백km 떨어진 자나투 449번지
소재 파고다 주식회사.

한영찬씨(58세) 영천씨(55세) 영주씨(51세) 등 "한씨 3형제"를 남미 한인
교포사회는 현지 섬유업계의 유력인사로 밀어올린 최고급 니트원단 공장이다.

대지 4만평 규모에 1백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있는 회사는 월간 2백만
달러어치의 고급 니트원단을 생산하면서도 외부차입금이 하나도 없는 탄탄한
업체다.

교포기업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한씨 3형제"도 숱한 우여곡절과 난관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한씨 3형제"가 아르헨티나에 발을 디딘 것은 30전년인 지난 66년 12월.

함박눈이 대지를 하얗게 옷입히고 흥겨운 크리스마스 캐롤이 부산항을
울릴 때 한씨 3형제는 이민선에 몸을 실었다.

60일간의 고된 여행 끝에 도착한 곳은 부에노스 아이레스.

"제2의 인생"의 개척한다는 부품 꿈을 않고 고국을 떠났지만 그들의
주머니에 든 것은 고작 2천달러 뿐이었다.

이 돈으로 집을 구하고 부두노동자들의 밀집지역인 레띠로 하꼬방 동네에
채소가게를 연 것이 이민생활의 첫 장이었다.

이들이 처음 사업을 시작한 레띠로는 일종의 슬럼가였다.

도로포장이 안돼있는 것은 물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

수도꼭지가 50집에 한집꼴로 있는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동네.

집안에서도 별이 빠끔히 보이는 지붕, 주변환경이 토해내는 악취속에서
오로지 성공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일을 했다.

젊음의 오기와 자존심은 모두 팽개쳤다.

매일매일의 매상액을 정확히 기록하는 꼼꼼함도 발휘했다.

피나는 노력을 한 결과 꽤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저렴한 값에 많이 판다는 박리다매 전략의 적중도 한몫했다.

드디어 알마센(식료품상)까지 겸하는 단계에 이르게 됐다.

이곳에서 가장 싼 술은 부두 막노동자들이 많이 마셔대던 포도주.

말이 포도주지 사실은 값싼 화학주에 불과했다.

그러나 3형제는 이 술을 한병 마셔보지 못했다.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어느날 막내동생이 그날 매상액이 이전의 매상 기록을 경신하면 포도주
1병을 따기로 하자는 제안을 했다.

값싼 화학주 1병을 위해 하루종일 뛰어 목표를 달성하던 날.

싸구려 포도주가 담긴 잔을 높이 쳐들고 서로의 건강을 기원하던 이들의
눈 가장자리에는 물기가 어렸다.

이들이 흘린 포도주색 피눈물.

형제간의 눈물겨운 우애가 오늘의 파고다를 만든 밑거름이 됐다.

낮에는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녔고 밤이면 코피를 흘리며 돈을 셌다.

1년이 지나자 그들은 한국교포로서는 처음으로 시내에 집을 구입해 이주할
수 있었다.

한국 원양어선들에게도 식품을 납품할 정도로 사업은 번창했다.

이제 "한씨 3형제"하면 교포사회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들은
선망의 대상이 됐다.

이들은 교포사회의 모델 케이스가 되어 교포들 간에 채소를 겸한 식료품상
붐을 일으켰다.

그들은 이에 만톡하지 못했다.

좀더 크고 장래성이 있는 사업을 물색하게 됐다.

그들이 눈독을 들인 것은 의류업.

한국인 R씨와 동업해 혁대공장을 설립했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의류업계는 전적으로 유태인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났다.

그들의 세계를 파고들다간 언제 어떻게 불귀의 객이 될지 모른다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

3형제를 아끼던 주위 사람들은 극력 만류했다.

그렇지만 결국 그들은 두꺼운 장벽을 부수고 진입에 성공했다.

이들의 덕택으로 3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의류도매상가에는 7백~8백 한인
상점들이 들어서서 유태인들과 대등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때 만든 혁대의 상표가 파고다.

그후 업종이 바뀌어도 상표는 언제나 파고다였다.

4반세기가 지난 지금 한인교포는 물론 원주민 유태인들 중에 파고다의
"다보탑" 로고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78년에는 의류 도매상가에 3개의 대형 상점을 소유하고 80여종의 의류를
직접 생산하게 됐다.

이때 이들은 한 차원 더 높은 사업을 계획했다.

바로 원단도매업이었다.

당시는 이미 교포들이 운영하는 의류상점이 수십개에 이르게 됐다.

그러나 유태인들의 횡포로 원단구입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원단도매는 시작하자마자 바로 자리를 잡았고 이들은 3년뒤 다시 도약을
계획한다.

그것이 바로 원단 생산공장의 설립이었다.

물론 상표는 파고다.

이후 파고다의 공장에서 생산된 원단들은 교포사회에 원단을 공급하는
주요업체로 군림하게 됐다.

교포사회가 유태인들의 시기어린 주목을 받게 된 계기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7백km 떨어진 곳에 대지를 구입, 원단공장을
세웠다.

이곳에 공장을 세운 이유는 그곳 주정부가 내놓은 혜택 때문.

7백km라면 부산에서 평양보다도 더 먼 거리.

독거미 전갈 뱀들이 우글거리는 허황한 벌판에 공장을 건설한다는 것이
결코 용이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개척정신이 몸에 밴 그들은 차라리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올들어서는 모든 생산체제를 현대식 모델로 바꿔 앞으로의 시장경쟁에
대비했다.

새로운 시설투자만이 끝없는 경쟁하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그간의 경험을 통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파고다의 신용은 유럽에까지 소문이 나있다.

국내 굴지의 염색료 생산업체나 원사공장에서 뿐만아니라 이태리의 MCS사
페라로사 독일의 크란츠사 테롯사 메이어사 브라질의 알브레히트사 등 섬유
기계 및 염색기계 제작회사들과 신용 거래업체로써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영찬씨는 "한국 사람으로써 당연히 한국의 기계들을 구입해야 하겠지만
사후 서비스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내구성도 유럽제품만 못하다"며
"구매절차도 유럽보다 까다로와 아무래도 유럽메이커와 거래를 하게 된다"고
안타깝게 말했다.

각종 사회활동에도 열심이며 교민사회에 대해서도 이들은 많은 공헌을
하고 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교민회관은 이들이 물색해서 구입토록 한 것.

이곳의 강단과 의자도 이들이 희사했다.

포클랜드 전쟁시는 기꺼이 2만달러를 정부에 내놨다.

2세들의 모국어 중요성을 알게하기 위해 초대 한국인학교 설립추진위원장을
맡아 한국의 대통령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때 시작된 학교건축이 완공돼 조만간 아르헨티나 정부로부터 정규학교로
정식인가를 받게 된다.

한영찬씨는 다년간 한국인학교 이사장으로 수고했으며 초대 상인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니트제품의 원단만 생산하는 파고다에서는 작년부터 직조처 수입판매에
나서고 있다.

도매상가들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에 거대한 원단 도매상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제품 판매망을 개편해 수입부를 개설하고 판매를 이미 실시하고 있다.

한국 업체들과의 협력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30년의 이민역사를 가진 이들.

모두 결혼해서 슬하 자녀들이 성년이 됐지만 한번도 재산을 나눌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지금껏 살아왔듯이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라 한다.

"정직하면 두려움이 없고 부지런하면 가난이 없다"는 그 아버지의 말을
이들은 소중히 표구해 간직하고 있었다.

그 아버지가 몸소 생활을 통해 3형제에게 보여 주셨던 것과 같이 그들도
2세들에게 오늘도 생활로써 보여주고 있다.

하루하루 늘어가는 흰머리와 주름살들은 이들의 고달팠던 "이민 30년"을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은 희망과 패기에 마음 설레며 20~30년 후를 계획한다.

이민역사 30년.

어느 누구도 앞으로 30년을 더 살 보장이 없지만 언젠가는 원사공장도
세울 계획이다.

그들의 표정에서 개척자의 내음이 물씬 풍겨났다.

< 김주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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