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 (537) 제12부 낙엽 진 뜨락에 석양빛 비끼고 (33)
것이므로 자견은 대옥의 병세가 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부인들을 부르러 가지 않았다.
설안과 몇몇 견습시녀들과 함께 응급조치를 취하고는 하룻밤을
지내보기로 하였다.
거의 혼절한 것 같았던 대옥이 밤이 깊어지자 조금씩 차도를 보이며
의식을 되찾는 듯했다.
하지만 또 언제 대옥이 피를 토하고 쓰러질지 몰라 자견을 비롯한
시녀들은 대옥의 침상 곁에서 꼬박 밤을 새웠다.
자견은 저녁 무렵에 설안이 화로에서 급히 끄집어낸 시 두루마리들을
다시 정리해보았다.
거의 다 타버려 알아볼 수 있는 시들은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개중에는
덜 탄 것도 있어 그것들을 따로 모아보았다.
만약 대옥이 이번에 병을 이기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간다면 몇 개
안 되는 그 시들이 그나마 유고집 역할을 할 것이었다.
대옥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꽃처럼 저 세상으로 가고 싶다고
했지만 이승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디 그러한가.
작은 흔적이라도 찾아 고인을 기리고 싶어하지 않는가.
그리고 아무리 본인이 흔적을 남기지 않고 가고 싶다고 해도 그
소원대로 될 리가 만무하였다.
하다 못해 머리에 꽂고 있는 은 비녀 한 개도 결국 흔적으로 남게 되는
것이 아닌가.
무엇보다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속에 시겨진 고인의 영상은 두고두고
그리운 추억처럼 자리잡게 될 것이었다.
자견은 한쪽이 타버린 시 두루마리 하나를 손질하여 다시 말면서
그 시를 훑어보았다.
외로운 물오리 석양빛 따라 흐르고
바람 세찬 강 위로 기러기 슬피 울며 나르네
아, 다리 하나 부러진 기러기
울어 울어 사람의 구곡간장을 녹이네
문득, 자견은 대옥이야말로 부모 형제 하나 없이 다리 부러진
기러기처럼 바람 세찬 인생의 강 위를 슬피 울며 날고 있는 신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기러기는 이제 날다가 상처가 깊은 나머지 그만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가.
자견은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그 시 두루마리를 말아 소중하게
문갑에 넣어두었다.
자견이 타다 만 시 두루마리들을 다 정리하고 돌아보니 설안을 비롯한
시녀들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얘들아, 너희들은 날이 밝으면 또 태산 같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잠을 좀 자두도록 하여라. 내가 대옥 아가씨 침상을 지키고 있으마"
시녀들은 자기들도 끝까지 밤을 새겠다고 눈을 비벼댔지만 결국 자견의
간곡한 권유를 받아들이고 잠을 자러 물러갔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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