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부인이 시녀들이 가져온 예단들을 목록과 함께 대부인에게 보이자
대부인은 일일이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예단들을 소상관에 있는 대옥이 몰래 설씨 댁으로 보내도록
하여라.

여기는 소상관과 멀리 떨어져 대옥이나 그 시녀들이 볼 리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대문으로 들고 나가지 말고 옆문으로 해서 가져가도록
하여라.

그리고 보채 쪽에서 보낼 예단은 설반이 감옥에서 나오면 하도록 하고
이번에는 아예 일절 아무것도 장만하지 말라고 하여라.

신방 이부자리도 이쪽에서 다 준비한다고 하여라"

대부인의 지시는 그러니까 보채는 몸만 오도록 하라는 말이었다.

왕부인은 희봉을 시켜 대부인의 지시 대로 하도록 하고 신방이 잘
꾸며지고 있나 보려고 별채로 건너갔다.

신방 꾸미는 일을 맡은 가련은 하인과 시녀들과 더불어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었다.

과연 이 신방에서 보옥과 보채가 첫날밤을 잘 보낼 수 있을지
왕부인으로서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보옥의 정신은 화약으로 뭉쳐놓은 폭탄과도 같아서 뇌관을 자극하기만
하면 언제 어느 방향으로 터질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한편 대옥은 의원이 처방해준 약을 썼지만 병세가 더욱 심해지기만
했다.

어제 문병을 왔던 집안 어른들은 보옥의 혼인 준비로 대옥에게로
와볼 여유가 없었다.

흉을 흉으로써 다스리기 위해 장례식 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대부인으로부터 받은 희봉이 대옥의 시녀들을 시켜 은밀하게 대옥의
수의를 만들도록 하였다.

대옥은 간간이 정신이 돌아와 주위를 둘러 보고 자견과 설안에게 뭐라
몇 마디 하다가 다시 피를 토해내곤 하였다.

대옥의 정신이 돌아올 적마다 자견이 간곡한 마음으로 대옥을 위로하며
사그라지려는 생명의 불꽃을 돋우려고 애를 썼다.

"아가씨, 허튼 소문에 마음 동하시면 안 돼요.

보옥 도련님이 몸도 마음도 성치 않은데 혼인은 무슨 혼인이겠어요?

다 지어낸 말들이에요.

그러니 다른 생각 마시고 몸조리나 잘 하여 빨리 일어나세요"

물론 자견도 보옥과 보채가 혼인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대옥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잠잠히 천장만 바라보았다.

한나절이 지나자 대옥이 헉헉거리는 목소리로 자견에게 상체를 반쯤
일으켜 달라고 해서 스스로 머리를 손으로 매만졌다.

"아가씨, 머리를 빗겨 드릴까요?"

자견이 빗을 챙겨 들며 물었으나 대옥은 머리를 저었다.

"아냐.

내가 혼자 길 떠날 준비를 해야지"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