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요? 딴따라입니다"

국내 음악계에서 내로라하는 재즈 피아니스트로 꼽히는 정원영 교수(35.
서울예전)는 자신을 주저없이 그리고 자신있게 "딴따라"로 소개한다.

들여다 보면 대중음악을 경시하는 사회풍토에 대한 은폐된 비판이다.

눌러쓴 야구모자에 찢어진 청바지, 휙 둘러멘 학생가방, 게다가 얼굴가득
번지는 해맑은 미소.

차라리 학생이라고 소개하는 편이 더 어울릴 법한 정교수는 알려진 대로
미국 버클리대에서 재즈를 전공한 몇안되는 실력파 재즈 뮤지션.

하지만 정작 자신은 "재즈 피아니스트"로 규정지어지는 것이 싫다고 잘라
말한다.

어디까지나 음악자체를 사랑하는 "음악인"으로 남고 싶다는 말이다.

음악인 정원영.

학교 강의외에도 하는 일이 많기도 많다.

국내 여러 굵직한 가수들의 공연및 앨범작업마다 빠지지 않고 참가한다.

여러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재즈에 대한 풍부하고도 깊이있는 이야기들을
정감어린 음성으로 풀어놓는다.

거기에 그간의 3개 앨범에 뒤이어 내놓을 본인의 음반준비까지.

하지만 모두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기에 힘이 솟는다.

"다시 태어나도 음악을 할겁니다"라고 주저없이 말하는 정교수의 인생
최대 좌우명은 "하고 싶은 일 하기 그리고 최선을 다하기"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가.

어릴적부터 음악이 "미치도록" 좋았단다.

고교시절에는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 나이트 클럽에서 일했다.

당연히 수업은 뒷전이었다.

결석을 밥먹듯이 해 퇴학의 위기도 여러번.

"문득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됐죠.

무엇을 하면서 살까.

결론은 하나, 정말 좋아하는 일, 음악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현실에서 음악을 하겠다고 나서는 아들에 대한 부모의
반응이 어땠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한마디로 미친놈 취급이셨죠.

비록 하루였지만 정신병원까지 끌려갔었으니까요"

정신과 의사와의 싸움은 정교수의 일방적인 KO승.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데 뭐가 잘못됐느냐는 정교수에게 오히려 의사가
설득을 당했다.

그렇지만 뒤늦게 음악으로 전향하기는 쉽지 않았다.

우여곡절끝에 명지대 영문과에 입학했지만 전공에 매달렸을 리는 만무하다.

결국 학교를 때려치우고 "음악"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말그대로 자유의 나라.

웃통벗고 반바지로 다녀도 누구하나 간섭하지 않는 곳.

일본에서조차 상영금지된 문제작 필름들이 여과없이 상영되는 곳.

"처음 한학기동안은 교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말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

숙제를 못해간 것은 말할 것도 없지요.

고생도 많았지만 미국에서의 6년동안은 마음껏 "진짜 음악"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꿈꾸듯 미국시절을 회상하는 눈빛에서 그리움이 읽힌다.

치열했던 젊은 날에 대한 한자락 향수일게다.

돌아와서는 바로 강단에 섰다.

"교육자"라는 이름에 얽매이는 것은 싫었지만 음악을 하는 후배들에게
주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음악인"이라는 자부심을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재즈라고 고상하고 트롯이라고 경박한 것은 아니거든요.

무슨 장르를 하건 가슴에서 우러나는 음악, 뜨거운 정성이 담긴 음악은
진정한 감동을 준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우리나라 음악인들은 너무 조로하는 것 같아요.

팔십에 들어서서도 연주를 하고 노래를 하고 판을 내는 외국에 비해
서른만 넘어도 은퇴하기 바쁜 우리나라 음악풍토가 아쉽습니다"라며
말을 접는 정교수에게서 우리시대 길이 남을 "롱런" 음악인으로 뿌리내려
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빛나고 있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