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욱 < 한국이동통신 사장>

30대에 ADD에 들어와 불혹을 넘기며 13년을 보내고 나니 내 인생은
어느덧 지명의 길목에 서 있었다.

그때까지 항상 내 마음 한구석에 간직해 온 소망이 있었다.

미국의 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탓인지 교수도 산업 현장의 경험이 있어야
하고 또 지역 사회의 산업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누군가 지방에
공과대학을 세운다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내려가 나의 여생을 교육에
바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때마침 모교의 최계근 교수님을 찾아 뵈었더니 "서박사는 그만큼 산업을
위해 봉사했으니 이젠 학교에 돌아오는 것이 어떠냐"고 하셨다.

항상 산.학 협동에 수범을 보이신 분의 말씀인데다 내 뜻과도 맞아
1983년 봄학기부터 나는 서울공대 전자과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새생활에 막 재미를 붙일 무렵 어느날 물리학자로 미국에서 대학 교수로
있다 귀국한 김호길 박사를 만났다.

그로부터 지방에 공과대학을 설립하려는 모 그룹의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나도 선뜻 참여하기로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계획은 끝내 정부의 인가가 나지 않아 무산되고
말았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 뻔한 일은 그렇게 지나갔다.

1983년 여름 체신부의 오명 차관과 1982년 초에 발족한 한국전기통신공사
(KTA)의 경상현 부사장이 각각 오찬을 하자는 전갈을 보내왔다.

두 분이 모두 한국전기통신연구소(ETRI)에서 개발 중인 전전자(digital)
교환기에 대한 얘기를 했다.

정책적으로 개발을 촉진시켜야 할 정부의 입장과 개발비를 출연하고
그 결과를 인수해서 운용해야 할 사업자의 입장에서 사업관리 품질보증
등에 관해 나의 조언을 청했다.

연구소의 사업관리 능력과 업체들의 품질보증 능력을 잘 알고 있던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 해 10월 나는 KTA 기술 자문 위원으로 위촉됐고 연말에 이우재
사장이 함께 일하자고 제의해 왔다.

ADD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분들의 부탁이기도 하고 국책 사업에 나의
조력이 꼭 필요하다니 거절하기 어려웠다.

1984년 1월 KTA로 옮겨 전전자교환기 사업단장과 품질보증단장을
겸임하면서 사장 직속 기구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처럼 신속한 조치는 사업의 긴박성을 통감한 오명 차관의 조치였다고
나는 짐작했다.

사실 모처럼 기회를 준 모교와 은사에 대한 도리는 아니었지만 벌려만
놓고 관리를 제대로 못하는 국책 사업을 그냥 모른 체할 수도 없었다.

오랜 고생 끝에 홀가분하게 청산한 연구 개발 업무로 다시 되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앞날이 아득하기만 했다.

나는 원래 교환기 전문가는 아니다.

그러나 교환기 개발을 농어촌용이라고 해서 만만하게 생각한 연구소
사람들의 말만 믿고 대규모의 투자는 했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한
공직자들의 불안을 남의 일처럼 생각할 수는 없었다.

다시 말하면 TDX의 실패는 좁게는 연구 기관의 공신력 추락이며 넓게는
모처럼 싹이 튼 정부의 연구 개발 의지를 꺾어버리는 좌절이기도 했다.

TDX는 바로 우리 전기 통신 산업의 미래를 가늠하는 시금석으로서
이 분야의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중대한 사업이라고 나는 판단했다.

그래서 나는 국방 연구 개발에서 쌓은 경험을 교육에 바치려던 계획을
바꾸어 민생 연구 개발에 전용해야 할 천명에 순응하기로 했다.

우선 나는 연구소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만들어 놓은 교환기 실물과
보고서를 비교해 보니 보고서의 내용이 실물과 달랐다.

그리고 8비트 프로세서를 전용한점, 모니터에 텔레타이프를 이용한 점,
그리고 전원을 자체 개발하겠다는 점 등은 교환기라는 상품을 개발하는
전문 연구소라면 좀더 신중했어야 할 일이라고 평가했다.

1962년부터 시작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진척됨에 따라 우리나라는
신흥 공업국 진입을 위한 각종 기반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 전기 통신은 최우선적으로 정비해야 할 분야였다.

다시 말하면 스트로저와 EMD 같은 기계식 교환기로는 더 이상 폭발하는
통신 수요를 충족할 수 없어 전화 적체와 도농간의 격차는 갈수록 심화
되었다.

이에 정부는 날로 고도화 다양화 되어가는 전기 통신 서비스에 대한
국민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전자교환기를 도입하기로 했다.

이에따라 1979년 말에는 아날로그식 M10CN을, 1981년 말에는 역시
아날로그식 1AESS를 도입,전자교환 방식에 의한 전화 서비스를 시작했다.

한편 1977년 말부터 KIST 부설 전기통신연구소(ETRI 전신)는 교환기
개발에 들어갔으나 연구 시작품으로 통화를 하는데 그쳐 상용화는
까마득했다.

1981년 10월 정부는 제5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하나로 전전자교환기
개발을 국책 사업으로 채택하고 개발비를 대폭 증액했다.

나는 이를 결정한 당시 공직자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전자교환기 개발은 역시 부진했다.

대형 연구 개발 사업을 관리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정부는 1984년 1월 KTA에 전전자교환기 사업단을, 그리고
ETRI에는 TDX 개발단을 발족시켰으며 내게 그 사업단을 맡긴 것이다.

당시 우리의 기술 풍토는 스스로 씨를 뿌리고 싹을 틔워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남의 밭에서 자란 꽃을 꺾어 오듯 외국 기술을 도입하거나
모방하는 "꽃꽂이 기술 문화"가 통신 사업을 지배했다.

특히 한 나라의 공중 통신망이 일정 규모 이상으로 커질 경우 그 핵심
기능인 국설 교환기를 자체 개발하여 구축하는 것은 공업 선진국들의
일반적인 관행이다.

그만큼 교환기의 국산 개발은 단지 운용의 신뢰성 확보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성도 높고 또 수출 산업으로도 발전할 수 있어 국가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정작 사업을 주관해야 할 KTA는 외국에서 도입한 M10CN으로
인해 체신부에서 독립하기 이전부터 곤욕을 치르고 있어 전자교환기의
국산 개발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가 하면 생산 업체들은 디지털 방식마저 외국기술을 도입해서
조립 생산할 속셈인지라 도입과 개발에 양다리를 걸치고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연구소는 연구소대로 국설 교환기 개발을 손쉽게 생각한 것 같았다.

이런 이유에서 고도의 전자교환기를 자체 개발한다는 것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회의적이었다.

나의 KTA 생활은 솔직히 말해 연구소의 경험 부족,제조업체의 양다리
걸치기, 운용 사업체의 전자교환기 공포증으로 둘러싸인 고독한 싸움으로
시작됐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모든 것을 뒤집어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1984년 4월에 개통한 TDX를 "시범 인증기(TDX-1X)"라고
이름붙여 참여자들로 하여금 국설 교환기의 연구개발 시험평가 품질보증
현장운용 등을 체험케 하고 사업 관리의 방법을 터득하는 교육 수단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아울러 현장 운용이 아니면 발견되지 않는 하드웨어의 결함이나
소프트웨어의 오류를 찾아냄으로써 전곡 가평 무주 고령에 설치할
"시험 생산기(TDX-1)"의 신뢰성을 향상시키는 한편 당시 농어촌용으로
도입이 확정된 AXE-10의 가격협상 카드로 활용했다.

TDX 사업을 성공시키려면 무엇보다도 관련된 사람들의 책임 의식이
필요했다.

KTA는 사업의 주체로서 시험평가 품질보증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는 한편 남의 기술에 의존하던 인습에서 벗어나 일본의 NTT처럼
스스로 연구 개발을 할 수 있는 한국의 선도 사업자로서 변신해야
했다.

또한 연구개발을 위탁하는 경우에도 성공하도록 지원하고 관리할 수 있는
인력과 제도를 갖추어야 했다.

그리고 연구소 간부에게는 시장 예측과 기술 정보 없이, 그리고 사업자와
합의된 규격 없이 의욕만으로 착수한 사업은 실패한다는 사실을 일러주었다.

또 다수가 참여하는 연구 개발에는 "게임의 규칙"을 정해 놓고 지키도록
했다.

업체에는 남의 기술을 얻어다 조립하는 상품의 품질관리(QC)에 머물지
말고 스스로 연구 개발한 상품의 품질보증(QA)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했다.

나는 KTA의 품질보증단장으로서 품질도 설계한다는 개념으로 연구 개발
단계부터 생산 설치 운용에 이르는 제품의 라이프 사이클, 즉 요람에서
무덤까지 품질을 관리하고 보증하는 제도를 확립했다.

그리고 이 제도를 업계에 적용하는 데에 필요한 관련 법규 규정 절차
등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당연히 기술과 관리 능력면에서의 취약점을 가진 국내 업계로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상당한 투자를 해야 했으므로 일시적이나마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이는 KTA에도 기존의 안이한 시험 검사 풍토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됐다.

변화와 개혁에는 많은 고통이 따르고 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불만이 쌓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국가를 위해서 어느 편의 입장을 들어주거나 원칙에서
한치의 양보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외과 의사의 입장이었다.

환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수술 환자의 고통스러운 외침에 연연할
수 없었다.

게다가 우리의 눈앞에는 이미 귀감이 될 만한 선례가 있었다.

개발 도상에 있는 나라 중에 전자교환기 국산 개발에 도전한 나라는
우리만이 아니었다.

인도(CDOT) 브라질(TROPICO) 등이 도전했지만 상용화에는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들은 우리보다 우수한 인력과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개발 생산
운용을, 이른바 삼위일체화할 수 있는 사업 관리 능력, 곧 시스템
인테그레이터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