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들이 의원을 부르러 간 사이에 대옥이 숨을 몰아쉬며 두 눈을
반쯤 뜨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가씨, 이제 정신이 좀 드세요?마님들이 아가씨 병세가 걱정되어
이렇게 오셨어요"

자견이 무릎 걸음으로 대옥에게로 바투 다가갔다.

대옥이 대부인에게로 눈길을 주더니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님, 할머님, 왜 나를 여기 영국부로 데려오셨어요."

대부인이 자기를 영국부로 데려오지 않았으면 이런 마음의 고통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원망이 섞인 말이었다.

"그때 네 에미가 죽고 너를 돌볼 사람이 집에 없었잖니. 네 애비는
나랏일로 바쁘고. 그래 이 외할미가 너를 간수해야지 누가 간수하겠니.

지금은 네 애비도 죽고 없으니 더욱 너를 돌볼 수 밖에. 네가 그런
소리를 하니 너무 서운하구나"

대부인은 대옥이 어떤 문제로 갈등하며 고통받고 있는지 아는지라
대옥의 마음 고생과 자신의 서운함이 합해져서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였다.

"그런 생각이랑 말고 빨리 몸이 낫도록 마음을 굳게 먹고 조리를
잘 해야지"

희봉이 대옥의 이마를 손으로 짚어보며 한마디 하였다.

"희봉 아주머니는 내가 빨리 죽어 없어지는 게 속이 편할 거야"

보옥과 보채의 혼인을 뒤에서 꾸미고 있는 장본인이 희봉이라는 것을
아는 대옥이 뼈 있는 말을 뱉고는 비웃 듯이 희미하게 웃음을 흘리며
스르르 다시 눈을 감았다.

희봉이 화들짝 놀라며 대꾸를 하려고 했으나 눈을 감고 있는 창백한
대옥의 얼굴을 보고는 그만두었다.

다만, "저애가, 저애가 못하는 소리가 없어" 하고 당황스레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때 의원이 달려와 대옥을 진맥해보았다.

주위 사람들이 진맥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울기가 간장을 엄습해 간장이 피를 담아둘 수가 없어 신기가 안정을
잃은 것입니다.

울기는 본인의 의지로 물리쳐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몸이 점점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음을 다스리고 피를 멎게 하는 약을 짓는 정도의 처방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 병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마음 먹기에 달렸습니다"

의원의 처방문에 따라 약을 지어 오기 위해 허겁지겁 다시 밖으로
나갔다.

대부인이 의원의 거동을 지켜보고 나서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이번 병은 보통 병이 아닌 것 같구나.

아무래도 흉을 흉으로 다스려야겠다"

"흉을 흉으로 다스리다니요?"

왕부인과 희봉이 의아해진 얼굴로 반문하였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