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마흔이 넘으면 자기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이 있다.

살아온 인생의 폭과 깊이가 그 나이쯤 되면 숨김없이 나타난다는
뜻이다.

일생을 한가지 일에 몰두해온 사람들에게서는 이런 말의 뜻을 쉽게
알 수 있다.

자신감과 지혜가 거침없이 뿜어져 나오게 마련이다.

원로민속학자 월산 임동권선생(70)도 그런 사람중의 하나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던 민속학, 특히 우리의 구전민요채집에 평생을
바쳐왔고 후진양성에도 힘써온 임선생은 중앙대학교에서 정년퇴직한
후에도 연구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는 민속학계의 대부다.

관악산 자락에 자리잡은 안양 관양동 자택으로 임선생을 찾은날
필자는 얼굴에 베어 나오는 삶의 깊이는 그이의 지나온 인생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확인했다.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전통적인 유교적 가풍속에서 자란 임선생의 많은
업적중에서도 우리전래민요를 집대성한 ''한국민요집'' 전7권완간은
단연 돋보인다.

지난 61년 첫권이 발간됐을때 미당 서정주는 중국의 시경에 비견되는
역작이라고 격찬했을 정도로 정통성을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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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퇴직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해오신 것으로 아는데 요즘은 주로
어떤 일을 하십니까.


"최근 몇년간 우리문화의 전파지인 일본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계속해
일본안의 백제문화라는 책을 썼는데 요즘은 일본에 전파된 대장군문화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몇년전에 일본고전을 읽다가 "대장군"이라는 문구를 발견하고 무척
흥분했었습니다.

일본에 대장군문화가 전파됐다는 확증을 잡은 셈이지요.

그 문구라는 것은 서기 680년께 교토에 새로운 궁을 짓는데 네귀퉁이에다
대장군을 세웠다는 것이지요.

당시 왕은 자신의 모계가 백제계통임을 내세웠었어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다른 서적을 뒤지다보니까 약 80개정도의
대장군을 확인했습니다.

이것까지는 해놓아야 할것 같아서 요즘 문헌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대장군이라면 우리의 천하대장군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같은 모양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아니고 일본식 신사로 변했는데 명칭이 대장군이라는 겁니다.

일본 전국에 있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일본 신사청의 문서를
뒤져보고 확인을 해야합니다.

그 과정을 위해 일본에 한 2개월 머물러야 하는데 연구비가 모자라서
아직 본격적으로 손을 대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민속학이라면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데 어떻게 시작을
하셨는지요.


"처음부터 민속학에 뜻을 두지는 않았어요.

대부분 그렇겠지만 중학생시절부터 소설가가 되리라고 마음을 먹고
공부를 했었습니다.

일본에서 중학을 마친뒤 한국에 돌아와서 국학대학에 다니던 시절
은사인 방종현선생의 권유로 시작을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소설은 자네 아니라도 쓸 사람이 많으니 민요를 하라면서
과제를 내주신게 계기가 됐습니다.

처음에는 사실 별로 마음에 없었는데 과제를 처리하다보니 재미를
느끼게 되더군요.

그래서 시작을 했어요"


-민요공부를 시작하셨는데 어떻게 민속학에 빠지게 됐는지요.


"민요를 학문으로 전공하는데는 세가지 방법론이 있어요.

첫째는 민요가 노래니까 음악으로서 접근하는 방법이지요.

그런데 나는 애국가의 음정을 잘 맞추지 못할 정도로 음치이니까
이 방법은 안되겠다 싶어서 포기했고, 두번째로는 문학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민요가사를 서민시로 보고 연구하는 것인데 중국의 시경도
서민시집이지요.

원래 문학을 공부했고해서 가능할 것 같기는 한데 이 방법을 쓰는 분이
이미 한 분 계셨어요.

그래서 마지막 방법인 민속학적 접근을 하기로 했죠.

"국화옆에서"라는 시는 서정주라는 작가의 경험이 나타나고 "향가"하면
신라의 불교가 연관이 되는등 특정주체가 있지만 "아리랑"이라고 하면
특정한 작자가 없습니다.

한민족 공동의 시, 그러니까 민족전체가 작자라고 볼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민속학적 접근이 가능한 것입니다.

방법은 이렇게 택했는데 참고할 만한 것이 주위에 아무것도 없더군요.

민속학자는 물론 없었고 강좌도 없어서 일본학자나 독일 프랑스 학자들의
책을 읽으며 거의 독학을 했지요.

일단 신학문을 통해서 연구를 시작하니까 선배들이 해놓은 민요연구중에
허점이 많이 보입디다.

그렇게 해서 글도 자꾸 쓰고 55년에는 국학대학에서 민속학강좌를
맡았지요.

민속학회도 만들고 23년동안 회장도 지내고 했더니 남들이 나를
민속학의 대부라고 부르더군요"


-혹시 후회같은 것은 해보신적이 없습니까.


"절대로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지난번 고별강연때 다시 태어나도 민속학을 하겠다고 했지만 정말로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시작은 우연히 하게 됐지만 그동안 민속학에 느껴온 매력은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학문을 하는데 끝은 없고 절정이라는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이 세상에서
남아있는 시간동안 하고 싶은 것 가운데 어느 것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학기를 끝으로 대학원강의도 하지 않기로 했고, 내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까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동안 부질없이 너무 많이 썼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혼자 쓴 책이 34권, 공저가 48권이니까 많은 사람들의 눈도 버리고
종이도 많이 낭비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하시는 일이 주로 일본관계라고 말씀하셨는데 그쪽으로 눈을 돌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민속학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민족의 자생적인 문화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문화중에서 외래적인 것을 다 빼고 남는 것은 샤머니즘입니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동북아시아의 원시종교입니다.

샤먼이라는 말은 살먼에서 온 것인데 이는 흥안산맥일대의 무당을
일컫는 말이고 몽골에서는 퉁글이라고 합니다.

결국 민속학을 연구하는 것은 이웃과의 관계를 연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우리문화의 원형이 있는 북쪽은 갈 수가 없었고 해서 우리문화의
전파지인 일본에 관심을 갖게된 겁니다.

일본에는 우리문화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오키나와 문화재1호는 고려사람들이 만든 종입니다.

일본의 고전을 읽다보면 백제가 많이 등장합니다.

8세기중엽부터는 신라세가 나타나지만 신라세가 들어가기전 약 100년동안
백제문화가 일본에서 뿌리를 내렸습니다.

일본국보1호는 백제사람들이 만든 반가유상입니다.

일본인들은 백제사람들이 만든 반가유상을 국보1호로 삼고있는데 우리는
일본적인 것은 모두 없애버리자는 주장이 있지요.

물론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자는 주장에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중앙청건물 철거비용을 우선 급한데 쓴다고 해서 우리정신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일제가 만든 것을 다 없애자고 한다면 우선 경부선부터 철거해야할
것 아닙니까"


-일본안의 백제문화는 그렇게해서 나온 연구실적인데 일본황실의 의례는
어떻게 연구하게 되신 겁니까.


"그것도 일종의 부산물입니다.

언젠가 일본의 원로학자들이 찾아와서 한국의 궁중의례에 대해서
캐묻더군요.

이상해서 이유를 물었더니 당시 일본천황이 병중인데 반세기가 넘도록
천황의 장례나 즉위식이 없었기때문에 아는 사람이 없었고 그들 문화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의 궁중의례를 연구해서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디다.

아차 싶어서 나도 일본의 궁중의례를 연구할 생각을 했지요.

대농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연구를 했는데 한국의 의례가 상당부분
일본의 궁성에 남아있다는 확증을 잡고 연구를 해서 책을 한권 썼지요.

원래 천황이 사망하면 후손이 4대봉사를 하고 아들을 낳게되면 5살까지
계집아이 옷을 입힙니다.

지금 천황은 유치원에 가야 하기 때문에 3살까지만 여자아이 옷을
입었다고 합디다.

우리나라에서도 전통있는 가문에서는 4대봉사가 기본이고 아들을
낳아도 딸을 낳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민요가 전공이신데 구전민요전집을 내놓기까지 어려움도 많으셨지요.


"서제에 있는 채록카드가 약 2만5,000장인데 어려움은 무척 많았습니다.

대학2학년때부터 시작을 했는데 당시에는 녹음기가 없으니까 전부 받아
써야하니 팔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고통스러운 경우가 많았습니다.

노래를 부르라고 받아적다가 중단시키고 다시 해달라고 하면 흥이
안나니까 제대로 부르지를 않아요.

특히 부인네들보고 베틀가 등을 불러달라고 하면 잘 하지 않습니다.

분위기를 조성해야 되는데 그러자니 돈도 좀 들지요.

약주 몇잔 들어가야 흥이 나니까요"


-전국 구석구석 안다닌 곳이 없겠습니다.


"전국을 거의 다 둘러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민속학을 하려면 장돌뱅이가 돼야합니다.

그것때문에 집사람한테도 말을 많이 들었지요"


-민속학자로서 요즘 청소년층 위주로 방향이 잡혀가는 대중문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새로운 것을 흡수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외래문화는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데 단지 요즘은 서구문화에 우리문화가
눌려있는 형상이라는게 안타깝습니다.

전통 또는 민속은 단절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가위를 봅시다.

조상들이 축적했던 문화는 대부분 무너지고 있지만 아직도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는 풍습은 남아있습니다.

교통대란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가는 이유는
결실의 계절에 신에게 감사하는 풍습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유교에서는 우선 조상에게 감사하게 되는 거지요.

이렇게 보면 한국적인 민속은 그대로 유지된다는 겁니다"

< 대담 = 김형수 정치부장 >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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