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욱 < 한국이동통신 사장 >

군용 장비품의 규격을 제정해 놓고도 그 실현에 필요한 시설이 없고 또
방법을 몰라 고민하던 우리는 곧 묘안을 찾아냈다.

우선 낙하 시험이다.

두께 5cm의 미송판을 깔고 1m 높이에 나일론실에 매단 피시험물을 면
꼭지점 모서리마다 충격을 주도록 가위로 실을 끊어 낙하시켰다.

무전기의 형체가 6면체이므로 면(6)과 꼭지점(8) 모서리(12)를 합해 26회
낙하시켰다.

다음은 침수 시험이다.

깊이 1m 물속에 피시험물을 규격에 제시된 시간동안 넣었다가 꺼냈다.

이번에는 온.습도 시험이다.

피시험물의 온.습도 환경을 규격에 제시된 시간표에 따라 온도의 하한에서
상한까지 습도와 함께 오르내리도록 했다.

문제는 영하 40도를 만드는 것이다.

드라이아이스를 이용한다 해도 영하 20도가 고작이었다.

그래서 두꺼운 스티로폴로 상자를 만들고 그 속에 액체 탄산가스를 뿜어
넣었더니 영하 40도까지 내려갔다.

그 다음은 진동 시험이다.

군용 트럭에 부착한 막대 끝에 무전기를 붙들어 매고 비포장 도로를
달렸다.

좀 거칠긴 하지만 막대의 길이로 진동수를 조절했다.

끝으로 수명 시험이다.

10만번 돌려도 이상이 없어야 하는 야전 전화기의 신호 발전기는 그 축을
변압기 권선기에 연결하여 규격에 제시된 회전수 만큼 돌렸다.

회전수는 자동차 속도계로 측정했다.

개발된 군용 통신 장비품의 시제품은 규격을 만족할 때까지 이러한 시험을
수없이 반복해야 했다.

이렇게 해서 개발된 KPRC-6이 오원철 수석에 의해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1972년 7월7일, 청와대 집무실의 박대통령과 KPRC-6으로 직접 통화하게
되는 기회가 찾아왔다.

이를 계기로 무전기 개발은 정식 과제로 채택됐다.

양산에 들어간 KPRC-6은 나에게 제1회 국방과학상을 안겨 주었고,
이때부터 ADD는 군용 통신 장비품의 연구 개발을 주도하게 됐다.

그러나 분대용 무전기도 시급했지만 사실은 소.중대용 무전기 AN/PRC-8,
9, 10계열이 더 심각했다.

미군은 이미 이들을 폐기했고 AN/PRC-25로 대체해 파월 한국군만이 이들을
운용하고 있었다.

어떤 경로로 들어왔는지 나는 청계천에서 PRC-25를 발견하고 몇 대를
입수해 성능을 평가해 보니 놀라운 것이었다.

흠이라면 출력단에 진공관을 썼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곧 미군은 PRC-25를 완전 반도체화한 PRC-77을 개발했다는 사실과
함께 월남전에서 쓰던 PRC-25는 한국군에 이관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됐다.

나는 걱정이 되어 국방 당국에 "한개라도 진공관을 쓴 무전기는 신뢰성이
낮고 유지에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우리도 PRC-77을 도입해야 하고
이왕이면 국내에서 공동 생산을 하자"는 건의를 했다.

그러나 미국이 나의 건의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우리
조달기관이나 생산업체들이 과연 군사 규격을 만족하는 품질을 보증할
자세와 능력을 갖고 있느냐가 더 문제였다.

당시의 상황은 탈모 비누, 군납 피복, 건전지, 야전 전화선, 통신 케이블
등의 불량으로 조달기관과 국산품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서 군용 무전기의
국산화는 모험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2년에 가까운 설득 끝에 미국이 품질 보증 전문가로 구성된 타당성
조사팀을 보내 왔다.

나는 그들에게 KPRC-6의 연구 개발, 시험 평가, 품질 보증 등 우리의
능력을 현장과 연구 기록으로 입증하면서 우리도 할 수 있으며 모든 책임을
내가 지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비로소 그들은 납득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미국의 품질 보증 전문가들은 ADD가 책임을 진다는 전제하에 PRC-77
의 한.미 공동생산을 미육군성에 건의하게 됐다.

그 후에 차량 탑재 무전기(VRC-12), 극초단파 다중화 통신기(GRC-103),
사격통제 레이더, 항공기 탑재 피아식별 장치 등의 공동 생산 사업도 모두
ADD가 마무리했다.

모든 공산품이 그러하듯 군용 장비는 개발에는 성공해도 양산에는
실패하는 업체가 있다.

PRC-77의 경우는 개발한 RCA를 제치고 양산에 성공한 멤코(Memcor)사를
선정했고, GRC-103도 미국의 매그나복스(Magnavox)사를 제치고 캐나다의
마르코니(Marconi)사를 선정했다.

같은 시기에 나는 무전기에 못지 않게 야전 전화기(TA-1, TA-312)와 야전
교환기(SB-22, SB-86)같은 유선 장비품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민생 전화기나 교환기도 제대로 만들어 본 일이 없는 업체들이 납품한
불량 야전 전화기와 교환기를 받아 놓고 야전부대들은 운용은 고사하고
반품도 하지 못해 골치를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ADD가 유선 장비품에 손을 대자 업체들이 좋아할 리 없었다.

그들은 "실현 불가능한 품질을 요구한다" "한국의 실정을 몰라서 그렇다"
는 등 심한 반발을 했다.

나는 그들을 연구소에 불러 군사 규격에 대해 설명하고 간단한 시범을
했다.

각자 납품한 야전 전화기를 낡은 미군 전화기와 함께 규격대로 떨어뜨리게
했다.

낡은 전화기 말고는 모두 박살이 나고 말았다.

업자들은 조용히 돌아갔다.

KPRC-6을 비롯하여 ADD가 개발한 통신 장비품들은 예비군보다는 우선
일선 부대에 공급되었다.

이들을 수입해서 보급했더라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고 얼마나 많은
외화가 소비되었을까 생각하면 나는 우리 연구원들과 생산업체들이 해낸
일에 대해 더 없는 보람과 긍지를 갖는다.

회고컨대 1970년 평연구원으로 들어가 육.해.공군의 연구 개발을 섭렵하고
소장을 거쳐 그만 둔 1983년까지 나의 ADD생활은 하루하루가 도전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나는 이러한 삶을 통해 무기 체계의 연구 개발과 방위산업의 본질에 대해
깊은 이해와 귀중한 체험을 했다.

선진국의 연구 개발 체제를 한국인의 의식 구조와 행동 패턴에 맞도록
보완함으로써 연구소의 개발 성과, 업체의 생산 능력, 군의 요구를 삼위
일체화하는데 힘썼다.

나의 업무 수행에 미국의 기술 지원은 절대적이었다.

특히 1974년에 미육군 통신 및 자동자료처리 연구소에서 보낸 교환 연구
생활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기회였다.

나는 통신 전자 장비 등 시스템의 연구개발, 시험평가, 품질보증 및
생산은 물론 군용 수정 발진자, 저항소자, 용량소자, PCB, HIC 등 고신뢰성
부품의 국산화에도 관여하여 기업을 도왔다.

그리고 델타 변조 다중화, 확산 스펙트럼(SS) 및 주파수 도약(FH), 컴퓨터
제어 안테나 패턴 조작(SNAP), 광대역 전파탐지 및 발사, 마이크로파 전력
증폭기의 반도체화, 비금속 물체 탐지, 각종 센서기술, 한글 RTTY, 포병용
컴퓨터 등의 개발을 주관했다.

이들 연구 개발 사업에 나와 함께 참여했던 지난날의 국방과학 기술인들이
민생 전자 산업 분야에서도 개척자 역할을 하고 있다.

나도 그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혼미에 빠졌던 TDX, TICOM, CDMA 등 주요
국책 사업을 구제해 냈다.

현실에 집착한 연구 개발을 하면서도 나는 적성 장비품에 대한 조사
연구에도 열중했다.

미래에 대비한 군의 지휘, 통제, 통신, 컴퓨터 및 정보 등 이른바 "C4I"에
관심을 갖고 각 군에 전자전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며 전자전 장비의 연구
개발 요구를 유도하고 전자전 교리 개발 및 교육 훈련에 조력했다.

전자전이란 전자파를 적이 이용하는 것을 탐지, 역이용, 억제, 저지하고
우군의 전자파 이용을 보장하기 위하여 전자파를 응용하는 군사 행동을
말한다.

따라서 무기 체계가 고도화되면 될수록 전장에서 적을 먼저 발견하고
기만 방해, 파괴하기 위해서는 전자전에서 우월해야 한다.

걸프만 전쟁에서 보듯이 현대는 전자전, 정보전, 컴퓨터전(Cyberwar),
네트워크전(Netwar)시대다.

지난날 우리 군 지도부에 미래의 전자전을 일깨워주던 내가 최근의 걸프만
전쟁을 보면서 느끼는 감회는 한 국방과학 기술인의 보람 그 자체이다.

최근에 상용화한 CDMA방식 셀룰러 전화도 내가 20년전 ADD에서 다루던
기술이 바탕이라는 점에서 이것 역시 예측 못한 행운이다.

아울러 국제 기술 협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내외 전문가들과
교류하게 된 것은 나의 국제 기반을 다지는 데에 큰 힘이 됐다.

그 덕에 전자 기술을 토대로 한국의 방위산업 기반을 조성한 공적으로
IEEE 펠로가 되는 영광을 얻었다.

ADD에서의 오랜 세월을 몇 꼭지의 글로 간추린다는 것은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다.

기억력의 한계도 없진 않겠지만 심문택 박사님을 비롯해서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분들과의 일을 낱낱이 들지 못해 안타깝다.

ADD는 요즈음 어떤지 궁금하다.

각박한 당시의 상황에서 차별화된 처우를 위해 출연 연구기관으로 설립된
ADD가 원래 태어났을 때의 소명은 다했지만 새로운 국가적 요구는 수용
못할 만큼 침체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높아진 국격에 걸맞게 연구 개발의 품격도 높아졌으면 하는 것이 ADD에
대한 나의 소망이다.

연구 개발 성과의 소비자인 군도 당장의 수요 충족에 급급한 장비 도입을
지양하고 국방과학 기술의 자립을 위한 전략적 사고를 해야 한다.

이용자인 군과 이용자를 위한 연구 개발이 상호 신뢰할 때에만 우리 군의
전력이 한층 더 배가되고 국가 안보가 공고해질 것이다.

국가와 민족이 영원해야 한다면 국토를 방위하고 민족을 수호하는 국방
과학 연구 개발 역시 영원해야 한다.

앞으로 국내외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ADD는 국가 최우선의 과학기술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