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지구반대편 카리브해 연안에 위치한 조그만 나라 코스타리카.

이 나라의 수도 산호세에서 다시 30km정도 내륙으로 들어가면 온화한
날씨와 아름다운 풍광만큼이나 순박하고 인심좋은 주민들이 모여사는
작은 동네가 나온다.

이 마을 끝 어귀에 있는 봉제공장 컨텍스(Contex)사.

부근에서 가장 많은 250명의 종업원과 한해 500만달러어치의 의류를
생산하는 이 봉제공장은 인근의 다른 공장과는 분위기가 크게 다르다.

키가 크고 눈이 파란 여공들의 꼼꼼하고 빠른 손놀림이 한국 여인들의
손맵시를 느끼게 한다.

컨텍스사는 다름아닌 한국인 김영호씨가 세운 업체다.

김사장은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인 지난 86년 모 회사 지사장으로
코스타리카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렇지만 얼마뒤 회사에 사표를 냈다.

봉제사업을 해보기 위해서였다.

"코스타리카의 투자환경은 소규모 영업활동에 적합하지요.

한국에서 20여년간 의류생산 분야 기술자로 종사한 경험도 있고 해서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당시 코스타리카산 섬유제품은 대미수출때 쿼터제한이 전혀 없었으며
수입관세도 극히 미미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쿼터가 없어 미국에 섬유수출을 하지 못하고 비싼값에
수출쿼터를 매매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쿼터없이 미국 수출이 가능하다는
것은 김사장에겐 커다란 매력이었다.

이와 함께 임금수준이 낮다는 것과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다는 점도
김사장을 유혹했다.

이곳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사람들의 친절한 태도도 그가 투자를 결정하게
된 또다른 이유였다.

그가 투자할 수 있는 액수는 서울에 있는 집을 포함해 모두 7만달러였다.

마침 T셔츠를 생산하다 문을 닫은 공장이 있어 임차계약을 했다.

공장 건물과 일부 설비자재를 포함, 10년간 월 2만5,000달러씩 지불한다는
조건이었다.

그가 빌린 공장에 설치된 15대의 재봉틀 중 쓸만한 것은 5대에 불과했다.

이중 6대를 겨우 쓸 수 있을 정도로 수리해서 모두 11대의 재봉틀로
사업을 시작했다.

이와 함께 여자의류를 생산하는데 필수적인 관련기계를 구입했다.

부족한 자금은 현지 은행에서 융자를 얻었다.

그 일부는 한국에서 기계를 수입하는데 쓰고 나머지는 이 공장에서 쓰다
남은 기계중 쓸만한 것을 수리하는 데에 썼다.

처음에는 종업원 30명으로 공장 운영을 시작했다.

다른 업체로부터 여성용 반바지와 셔츠를 조금씩 하청받아 생산하는
일이었다.

공장내에 조그만 간이침대와 책상을 놓고 공장에서 먹고 잤다.

그렇지만 사업은 쉽게 궤도에 오르지 않았다.

"처음 3개월간은 이익은 커녕 종업원 월급주기도 벅찼습니다"

한국에서의 경험을 되살려 생산라인을 나누고 인원을 적절하게 배치했지만
공장을 가동한지 몇개월 뒤에야 제품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나올 정도였다.

종업원들이 전혀 숙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3개월이 지나도록 이 공장에서 하루 생산하는 반바지는 겨우 50벌에
불과했다.

이 외에 생산한 T셔츠 스커트 등도 낮은 품질 때문에 하청받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할 수 없이 서울에 마지막 남은 부동산을 처분했다.

그나마 외화 해외반출 규제 때문에 5,000달러 이상을 수수료 명목으로
지불하고 손에 쥔 돈은 6만달러.이 돈으로 오바로쿠 재단기 재봉기 몇대를
구입하고 나니 남는건 1만5,000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코스타리카내 외국계 봉제업체에서 생산하고 있는 의류를 샘플로 제작하여
자신의 공장에서도 좋은 옷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납득시켰다.

일단 일감을 받으면 100% 하자없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종업원들이 다 퇴근한 뒤에도 혼자 남아 더 예쁘고 질긴 바지를 만들기
위해 연구했다.

생산라인을 개선, 제작시간을 단축시킬 방법도 고안했다.

외국샘플을 받아와 밤새도록 연구하기도 했다.

이렇게 몇개월을 보내고 나니 여자용 바지 생산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

미국계 업체인 코스코아사 등에서 바지 뿐 아니라 스커트와 블라우스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모든 원자재를 주문업체로부터 받아 주문자가 원하는 의류를
제작 납품하는 식으로 생산했는데 여자용 바지는 한벌에 1달러, 스커트는
2~3달러선에 불과해 하루 200벌 이상 생산해도 별로 남는 것이 없었다.

김사장은 하청만 받아서는 공장 운영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미국을
포함한 인근 국가의 바이어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바이어로 부터 주문을 받기 위해 여러 차례 샘플을 보내고 그래도
답신이 없으면 직접 찾아갔습니다.

며칠이고 호텔에서 기다리다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오는 때도 많았지요"

미국시장에서 생판 모르는 여자용 의류 바이어를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사실 그때만 해도 그는 무역업무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또 바이어가 신용장(LC)을 개설해 의류를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바이어
측에서 보내준 원단과 자재를 받아 완제품을 생산해 선적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신용을 쌓기 위해서는 더욱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의류제작과정을 꼼꼼히 확인하고 납품기간을 정확히 지켜 신용을
쌓아 나갔다.

특히 그의 세심함은 코스타리카업체들과 바이어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고
이제는 그의 추천장만 있으면 종업원이 다른 어떤 봉제공장에 별문제없이
취직할 정도가 됐다.

바이어에게 신뢰를 얻게 되자 주문량이 해마다 증가했다.

93년에는 미국의 대형 체인백화점인 "제니"와 "리츠"로부터 스커트
블라우스 임신복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김사장은 나이가 50세가 넘었지만 모든 종업원 중에서 가장 빨리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한다.

공장내에서 사용하고 있는 재봉틀 전기 수도 등 어느것 하나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것이 없다.

전 종업원 250명의 생일을 메모해 두었다가 생일이 되면 출근전에 장미꽃
한송이와 조그만 카드 한장을 작업대 위에 놓아 둔다.

그 비용은 1인당 30센트지만 효과는 100달러 이상.

아직까지 이 공장에는 노조가 없다.

그는 공장의 누구보다도 작업내용을 더 잘 알고 있다.

조그만 휴게실 의자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의 손을 거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김사장이 종업원을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는 이유다.

지금도 그는 행정업무는 사무실 직원 3명과 함께 처리해 나가고 있다.

최근 미국시장이 활발치 못해 다른 봉제공장들은 상당한 타격을 받고 있다.

그러나 김사장은 일찌감치 여자용 특수의류 생산을 전문화해 큰 영향을
받고 있지는 않다.

특히 임신복 등은 점차 유행에 민감해져 가고 있어 이 공장 제품의
다양한 색감과 디자인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런 특수의류는 제작공정이 어려워 단기간 대량생산이 불가능합니다.

우리 공장이 인근에서 유일하게 생산하고 있지요"

지속적으로 일감이 늘어남에 따라 공장시설도 꾸준히 확장했다.

그러나 한국산 관련 섬유제작 기계류는 타국 제품보다 10~15% 이상 비싸
구입을 포기했다.

원단도 국산원단의 가격이 갈수록 인상되고 있어 수입선을 다른 나라로
돌릴 수 밖에 없었다며 김사장은 안타까워했다.

지난해 450만달러어치를 수출한 김사장은 5년내 1,000만달러를 수출한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이를 위해 특수의류인 웨딩드레스 턱시도 생산을 위한 기술을 개발하고
지난 6월부터 본격 생산하고 있다.

수출 대상지역도 미국뿐 아니라 인근 멕시코등 카리브해 연안국가와 인근
니카라과까지 확대해가고 있다.

"아무리 세계 봉제시장이 불황을 겪더라도 전문화된 의류 수요는
무궁무진하지요.

이미 코스타리카 내에서는 최고수준이지만 앞으로 세계 수준의 기술을
갖춰 나갈 것입니다"

< 김주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