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영화는 극영화와는 달리 사실을 담은 녹직션물이다.

기록영화라는 말은 영국의 영화인인 J 그리어슨이 선지의 영화평에서
"다규멘터리 필름"이라고 지침한데서 비롯되었다.

다큐멘터리의 어원은 라틴어로 중서나 순서를 뜻하는 "dacumentum"이다.

기록영화란 "기록에 의거해 만든 것"이라 할수 있다.

서양 기록영화의 효시는 영국의 R 플라허티가 1922년 에스키모의
처절한 생존투쟁을 생생하게 촬영한 "북극의 경이"다.

그는 그 이후에도 "모아나""아란"이라는 기록영화를 만들어 냈다.

그리어슨도 청어를 잡는 어부들의 생활상을 담은 "유망선"을 내놓았다.

이 기록영화들은 모두가 인간과 자연이라는 주제를 통해 그 양자간의
감성이 교류되는 서정적이고 유미적인 작풍을 제시했다.

그리어슨의 정의대로 "현실의 창조적 산물"이었던 것이다.

기록영화는 그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이성과 감성으로
경제.문화.사회계의 진실한 당면문제와 그해결책, 인간지식의 이해와
확장을 묘사하는 것" (1948년 세계 다큐멘터리협회의 정의)으로
발전되었다.

또 그것은 극영화의 수법을 가미한 선전영화를 포괄하는 것으로
확대되면서 2차대전 앞뒤의 시기에는 정치적 목적에까지 이용되었다.

나치줄과 그의 승리를 선전한 독일의 "의사의 승리" 역사기록을 담은
미국의 "나의 투쟁"이 그 대표적인 검토중이다.

한국 기록영화의 역사는 1919년 서울 단성사에서 첫 한국 영화인
"의리적 투구"와 더불어 상영된 "경성전시의 경"에서 시작되었다.

그뒤 "경성교외전경" "고궁인산살경" "호열자" 등이 나왔다.

한편 일제는 식민정책을 옹호하는 "조선사정", 한국인의 전쟁참여를
고취시키는 "승리의 뜰" "지원병" 등 선전영화를 만들어 냈다.

광복후에는 보스턴마라톤대회의 우승자인 서윤복에 관련된 실사장면을
편집한 "패자의 수도"에서 시작하여 대통령 이승만의 연설과 업적을
담은 "민족의 절규", "여수순천발란사건, "북한의 실정" 등이 속속
만들어졌다.

6.25발발 이후의 기록영화제작은 대부분 국립영화제작소가 주도했다.

그 대표적인 것은 정부의 정책만을 일방적으로 선전하는 "대한뉴스"였다.

그 때문에 "대한뉴스"는 문민시대에 들어와 폐지되는 운명을 맞아야
했다.

그런데 정부는 그 공백을 메우고자 김영삼대통령의 치적을 담은
기록영화를 국립영화제작소로 하여금 만들도록 하겠다고 나섰다.

자칫 "대한뉴스"의 전철을 되풀이하는 내용이 되지 않을까 우려되는 바
없지 않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