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시아 과학사서술에서의 자랑과 편견 >>

박성래 < 한국외국어대학교 부총장>

우리 한국인은 모두가 1442년 세종 때 처음 만든 측우기는 서양부다
200년 앞선 훌륭한 역사의 자랑거리로 알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측우기가 요즘 여러해동안 점점 중국것으로 바뀌어
오고 있다.

중국학자들은 사소한오해때문에 측우기를 중국에서 만든 것으로
단정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양학자들은 중국문헌만 읽기 때문에 중국측주장에 따르게
되어 이제 측우기는중국에서 만들어 한국에 보내준 것으로 세계적으로
공인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될수 있는한 많은 중국과학사학자들에게
이 잘못을 깨우쳐주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4년전 일본 경도에서 열린 제7회회의에서 한국의 과학사학자들이
8회 회의를 유치하기로 했을때 우리는 이미 이문제에 주목하고 있었다.

이 한번만으로 측우기에 대한 정당한 자리매김이 이루워지리라고는
생각할수 없지만 이런 노력을 거듭하는 가운데 점차 우리는 측우기도
되찾고 또 다른 우리역사의 빼앗긴 영역에 대해서도 제자리를 찾아줄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번 강연에서 측우기만을 말하지 않겠다.

이자리는 원래 동아시아과학사를 다루는 중요한 국제회의이어서
측우기문제만으로 개막연설을 채우기가 민망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동아시아과학사서술에서의 자랑과 편견"이란 제목으로
민족적 자랑에 급급하다 일어나는 세나라 과학사에서의 잘못된 부분을
몇가지 지적하고자 한다.

각기 제나라자랑에 바쁘다보면 역사를 잘못판단하는 편견이 생기게
마련이다.

일본의 고대 과학기술은 모두 삼국의 영향아래 발달했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의 과학사책에는 거의 "중국의 영향"이라고만 강조되고 있다.

일본의 경우는 그 핵심시기인 6~7세기의 일본서기 내용에서 한국에
대한 기록은 1028회나 보이지만 중국에 대한 기록은 69회정도밖에
나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일본학자들은 중국의 영향만을 고집하고
있다.

일본고대사에서의 한국의 역할이 과학사를 폭넓게 다룬 일본학자의
저작에서는 거의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측우기문제도 그렇다.

원래 우리 측우기가 세상에 그 존재와 중요성을 알리게 된 것은
1910년부터의 일이다.

특히 당시 기상대에 와 있던 일본인 기상학자 화전웅치는 1910년 불어로
발표한 논문에서 측우기가 1442년 세종때 한국에서 처음 발명되어
사용되었고 이는 서양에서 측우기가 사용되기 전보다 200년 앞선 일이라고
썼다.

여기에는 측우기 사진도 한장 들어 있었는데 그 사진은 지금도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측우기와 그 받침이었다.

그 받침에는 치우대라는 이름이 새겨있고 그 엎에 작은 글자로 "건륭
경인년 5월에 만들었다(건륭경인오월조)"는 글씨도 새겨있다.

이 불어논문은 그대로 같은해 "영국기상학회지"에 영어로 번역되어
실렸다.

또 이듬해에는 영국과학잡지 네이처지가 그 내용을 기사화했다.

그때마다 그 사진도실려 세계에 알려졌다.

이렇게 세계학계는 점점 세종대의 측우기를 서양보다 2세기 앞선
세계최초의 강우량측정장치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추세가 언젠가 중국학자들에 의해 뒤집히기 시작했다.

아마 처음 이사진을 본 어느 중국학자가 건륭이란 연호에 눈이 번쩍
뜨이게 되었을 것이다.

건륭이란 중국 청나라 고종의 재위기간 60년동안 (1736~1795년)사용된
중국연호이기 때문이다.

중국학자들은 이 측우대는 분명히 청나라가 만들어서 여러곳에 보낸것인데
그 가운데 하나가 한국에 남아있는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도 중국연호를 썼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중국학자들이야
알 이치가 없다.

그래서 중국학자들는 점점 더 한국에 남아있는 측우기를 중국것이라고
판단하고 이보다 앞에는 또 비슷한 어떤 측우기에 관한증거가 없나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결과 중국학자들은 1247년 나온 수학책"수서구장"의 수학문제하나에
주목하게 되었다.

원뿔모양의 그릇에 비가 얼마높이까지 찼다면 평지에는 얼마나 비가
왔는가를 계산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그들은 이 문제를 보아 그 이전에 이미 중국에는 측우기가 있었다는
증거라고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런 주장은 중국이 개방되고 점점 중국에 대한 세계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더욱 강한 기세로 세계학계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래서중국과학사의 세계적 권위자로 꼽히는 영국의 조셉니덤이나
일본의 수내청등이모두 중국측 주장에 동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물론 이와같은 세계학계의 동향은 잘못이다.

측우기는 세종때의 제작과정이 상세한 기록으로 "세종실록"에 나와있을
뿐아니라 우리역사에서는 측우기를 사용해 강우량을 측정해 보고한 기록이
끊임없이 "실록"등에 남아있다.

또 많지는 않아도 옛측우기도 몇개가 실제로 남아있다.

그러나 중국에는 측우기라는 표현조차 어느 역사기록에도 남아있지
않다.

또 측우기나 측우대가 남아있는 것도 없다.

측우기를 만들어 한국이건 어디건 보냈다는 기록이 있을 까닭이
없다.

중국학자들은 건륭이란 중국연호가 새겨있다하여 그것을 중국것이라
잘못판단한 것일 뿐이다.

세계학계에서 측우기는 20세기 전반동안에는 한국것이었지만 20세기
후반동안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중국것으로 둔갑해가고있는 셈이다.

이를 바로잡아 측우기를 한국의 것으로 되찾는 일은 말처럼 그리
간단한게 아니다.

중국과학사책은 모두 측우기는 중국에서 만들어 한국에 보낸것으로
쓰여있다.

그리고 과학사를 하는 중국학자는 아주 많고 앞으로도 더욱 많아질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 모두 선배들의 책을 참고해서 글을 쓰면서 계속 "측우기는
중국것"이라 써갈 것이 분명하니말이다.

그리고 한번 중국것이라 쓴 학자는 될수 있으면 그 부분을 수정하지
않으려 할 것도 분명하다.

그러니 이를 바로잡고 측우기를 우리것으로 되찾기 위해서는 우리쪽에서
끈질긴 노력을 계속하고 중국과학사 학자들에게 설득을 계속할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중국사람들은 우리의 국보 "다라니경"도 중국것이라고 고집한다.

8세기 초에 만든 두루말이 불경 다라니경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세계에인정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한국의 인쇄기술발달은 증거할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보물이다.

그런데 불국사 석가탑에서 1966년 처음 발견된 이 불경을 중국학자들은
당나라에서 만들어 신라에 보낸 것이 틀림없다고 분명한 근거없이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이미 여럿 더 있을 것으로 보이고 앞으로 더 나타날
것도 분명하다.

이상 측우기와 다라니경의 예를들어 중국과학사가 얼마나 한국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무심한채 중국 중심으로 과학유물을 대해왔던가를
지적해봤다.

중국학자들이 한국의 연호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을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중국학자들이 한국역사에 조금만 관심을 갖고 이 문제를 대했다면
건륭이란 연호때문에 1770년의 측우기가 중국것으로 둔갑하는 실수는
면할수 있었을 것이다.

동아시아 3국의 과학기술사는 당연히 아주 밀접하게 관련된 가운데
전개되어 왔다.

그 상호관계를 밝혀가는 일은 앞으로 우리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힘쓰지
않으면 안될 우리모두의 과제이다.

그리고 그런 노력속에서 우리는 보다완전한 역사를 재발견해 갈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편견없이 세나라의 역사를 연구하는 자세를
먼저 확립해 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 편견은 민족적 자긍심에서 비롯하는수가 많다.

하지만 어떤 자랑도그것은 편견의 근원이 될수밖에 없다.

우리는 보다 현명한 역사해석에 이르기위해 가능한한 우리의 자랑과
편견을 뛰어넘으려는 각오를 단단히 하지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번 서울대회가 우리과학사학자들 모두에게 "자랑과 편견의 문제"를
조금이라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우리 세나라의 과학사학사들
은 앞으로 더 좋은 동아시아과학사를 쓸수 있게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노력을 통해 보다 우호적인 국제관계를 만드는데에도
조금은 이바지할수 있을 것이다.

그 효과가 비록 아주 조금일지라도 시작은 언제나 중요한것 아닌가.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