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들이 중형에 처해질 위기에 있다.

국민들 가슴은 착잡한 상황이다.

이중에서도 남다른 감회에 젖는 사람이 있다.

이재현 미 웨스턴 일리노이 주립대 언론학 교수(70).

이교수는 주미대사관 공보관 시절인 73년 미국에 정치적 망명을 요청하고
그곳에서 23년간 둥지를 틀고 산 사람이다.

유신을 단행한 박정희정권의 무리한 요구들을 수용하려들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진 질곡이었다.

자연히 미국에서 사는 동한 한국의 인권과 민주화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고 또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이 대열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주 프랑스 한국대사관 공사, 허정내각당시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그에게는 임진왜란때 진주성을 중심으로 왜병에 항거했던 의병대장
이의정의 피가 흐르고 있다.

바로 이런 피가 근세에 이르러 저항정신으로 되살아났는지 모른다.

이런 전력때문에 그는 망명이후 한 번도 한국을 찾을수 없었다.

그러나 문민정부 출범이후 분위기는 많이 바뀌었고 광주대학교는 그를
1년간 초빙교수로 초청하기에 이르렀다.

이교수를 만나 그간의 회고와 감회를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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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이 있고 난 후 미국에 망명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회고해주시
겠습니까.

<> 이교수 = 유신이 있기 며칠 전 "언제 언제까지 대기하라"는 중대지시가
하달됐습니다.

전쟁이 나는가 보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바로 미국방부에 전화를 걸어
"휴전선에 이상이 없느냐"고 물었으나 "아무 이상이 없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이번에는 국무부에 전화를 걸어, "한국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으나
별일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전쟁은 아니구나 하고 안심하고 있는데 텔렉스가 또 한 장
날아왔습니다.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 이교수 = 이북과 남북협상을 하고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체제가 필요하다는 점을 미국정계와 언론계에 설득하라는 지시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유신이 선포되더군요.

다 아는 얘기지만 박정희대통령이 3부에 군림하는 상황이 됐고 선거를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하게 됐으니까 김일성이 하는 선거나 다를 바 없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망명신청을 했습니까.

<> 이교수 = 바로 망명신청을 한 것은 아니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여러 가지 수용하기 어려운 지시들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든다면.

<> 이교수 = 대사관에 같이 근무하던 외교관중에 한혁훈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2년의 잔여임기를 남겨놓고 있었습니다.

유신정부가 이 사람에게 난데없이 일주일안으로 들어오라는 귀국령을
내렸습니다.

당연히 한씨는 이를 거절하고 사표를 내더군요.

이렇게 되자 불똥이 나에게 떨어졌습니다.

공보관이었던 저보고 한씨를 강제송환하라고 지시를 하더군요.

작곡가인 윤이상씨가 연루됐던 독일 동백림 사건을 보아도 아시겠지만
어떻게 미국같은 자유국가에서 개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제송환하는
폭거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납치행위며 미국법을 무시하는 범법행위입니다.

당연히 거절했지요.

-그랬더니 어떤 반응이던가요.

<> 이교수 = 당신은 외교관이고 따라서 치외법권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며 한씨에게 간첩혐의가 있어 송환하려는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 된다고 강요하더군요.

그러나 듣지 않았습니다.

사태전개는 뻔한 것이었고 유신정부는 저에게까지 귀국령을 내리더군요.

-귀국령을 어떻게 피했습니까.

<> 이교수 = 당시 잘 알고 지내던 워싱턴 포스트지 국제담당부 국장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상황이 다급하게 됐다며 조언과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그는 국무부에 망명신청을 하는데 어려움이 없는지 자세히 알아 본 후
가족과 함께 모처에 피신해 있으라고 조언을 하더군요.

그렇게 했습니다.

-유신정부가 색출하려고 하지 않던가요.

<> 이교수 = 왜 아니겠습니까.

유신정부는 미국무부에 저에 대해 터무니없는 중상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입니다만 제가 머리가 돌아서 그런거니까 빨리 되돌려
달라고 했다더군요.

또 공금횡령을 했다며 거짓말을 해댄것은 물론 평양으로 입북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엉뚱한 소리들까지 했습니다.

미국무부는 전후좌우를 잘 파악하고 있었을뿐 아니라 유신자체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따라서 미국무부는 끝까지 저를 잘 보호해주었고 망명신청도 기꺼이
받아주었습니다.

-근거지였던 워싱턴에서 중서부인 일리노이주까지 옮겨 가시게 된 동기는.

<> 이교수 = 망명신청을 받아준 국무부가 한가지 조언을 하더군요.

주거지를 우선 뉴욕이나 LA처럼 큰 도회지가 아니면서 인터스테이트
(inter-state)고속도로와 멀지않은 곳에 잡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도회지에서는 살인테러를 당하기 쉽다는 이유였습니다.

65년 뉴욕주에 있는 시라큐스대에서 언론학박사학위를 받아 놓은게
근거가 돼 현재 근무하고 있는 웨스턴 일리노이 주립대에서 교수자리를
쉽게 얻을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현재 정가에서 활약하고 있는 지도층과도
교분이 있었으리라고 보여지는데.

<> 이교수 = 물론 있었지만 아주 친밀하고 밀도있는 교분을 한것은
아니었습니다.

김대중총재 등이 아직도 연하장등을 보내주기는 하지만 저는 그저
정례 인사정도의 것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 나라가 민주화된 상태이니까 우리들의 몫은 다 끝났고 새로운
사람들이 나서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김영삼 대통령과는 교분이 없었습니까.

<> 이교수 = 그분과의 관계도 비슷한 수준의 교분이었습니다.

10여년전 김대통령은 민추협을 조직했고 제가 있는 일리노이주의
시카고시를 방문했습니다.

우리는 교민들을 열심히 불러모아 환영대회를 조직했고 1,000여명이
참가했었습니다.

-허정 정권당시 청와대 대변인을 지내셨으니까 내각제에 대한 남다른
견해가 있으리라 생각되는데 정가에서 가끔 불거져 나오는 내각제개헌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 이교수 =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내각제하에서는 우선 국민의 대표권이 무시되기 쉽습니다.

정치적 담합이 자주 발생하기 쉽고 이런 과정에서 낭비가 생기고
효율이 떨어지기도 쉽습니다.

-내각제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계시지만 대통령제에 대해서도
100% 만족하시지는 않을텐데.

<> 이교수 = 대통령중심제가 잘되려면 저는 공천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공천제는 임명제나 다름없는데 공천제와 임명제는 분명
달라야 합니다.

특히 선거공영제가 도입되어 선거가 투명하게 진행돼야 한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습니다.

-언론학 교수이신데 한국언론을 평가하신다면.

<> 이교수 = 우선 신문기사 제목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기사가 너무
많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한 사실보도(Straight)기사인지 기자 자신의 주장을 펴려는지를
구분하기 어려운 기사가 많습니다.

기자는 자기가 쓴 기사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책임을 지려면 확인과정을 중시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이와 동떨어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신문의 기사중 가장 못마땅한 것은 어떤 사람의 이름대신
L씨니 K씨니 하는식의 기사들입니다.

이름을 밝힐 수 없으면 왜 밝힐 수 없는지를 분명히 하든가, 아니면
아예 언급하지 말아야지 불분명하게 해 놓는 것은 언론 ABC에 어긋납니다.

-신문사간의 과당경쟁에 대한 비판도 많은데.

<> 이교수 = 신문이 경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우리나라 신문들에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뭔가 다른것을 내놓으면서 스스로가 남과 다르며 남보다 낫다고
주장해야지 똑같은 신문을 만들면서 자기가 우월하다고 주장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시말해 다양성이 없다는 점은 참 아쉽습니다.

예를 들어 인터넷기사가 우리나라처럼 홍수난듯 깔려있는 신문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인터넷을 제대로 이용하려면 영어를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영어가 모국어처럼 편한 사람이 얼마나되는지 한번
심각하게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언론의 독립성 문제도 거론되고 있는데.

<> 이교수 = 언론은 정부로 부터도 독립돼야 하지만 기업으로부터도
독립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제4부가 되기전에는 신문의 사명을 다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속에서 일하는 기자들도 자존심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23년만에 귀향하신 상황에서 사람들이 달라졌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 이교수 = 성격이 급해진 것은 물론 입에 담기 어려운 욕들을
너무 많이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대담 = 양봉진 국제부장 >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