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후, 보옥은 산보를 하며 맑은 공기를 쐬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
보았다.

조금씩 발걸음을 옮겨 대옥이 기거하는 소상관까지 가볼 참이었다.

심방정과 심방교 쪽으로 뻗은 뚝길을 걸어가는데, 늦은 봄기운과 초여름
기운이 섞인 대기 속에 버드나무와 복숭아 나무를 비롯한 여러 수목들이
서로 내기를 하듯이 싱그러운 자태를 뽐으며 우거져 있었다.

그런데 소산뒤로 돌아가니 큰 살구나무에 벌써 콩알만한 작은 열매들이
파릇파릇 달려 있었다.

얼마 전에 살구꽃이 만발해 있었던 일을 기억하며 모옥은 문득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열매가 맺혀 있는 것을 보고 반가원하기보다 꽃들이 모조리 떨어져
버린 사실로 인해 가슴 아파하는 보옥이었다.

저 열매들도 다 떨어지고 가지마져 앙상해지겠지.

나중에는 살구나무가 아예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겠지.

보옥도 자기 몸도 저 살구나무 같지 않은가 생각했다.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오묘하고 강인한것 같으나 때가 지나면 진액이
마른 나무가지처럼 결국 부스러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청춘과 장년 시절에 잠시 열매를 맺는 듯하다가 어느새 헐벗은 가지가
되어 죽음의 삭풍을 맞이하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대옥이 소주로 내려가게 되었다는 자견의 농담한 마디에 이렇게 몸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들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보옥은 한동안 보금의 미색에 마음이 홀려 있긴 했지만 마음
깊숙이에서는 여전히 대옥을 연모하고 있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
셈이었다.

인생의 꽃과 열매가 다 떨어진다 하여도 사랑 하나만 얻으면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보옥은 인생의 무상함고 아련한 행복감을 아울러 느끼며 살구나무
둥치를 한번 손으로 쓸어보고는 또 하나의 산모퉁이를 돌아나갔다.

참새 한마리가 이 나무 저 나무 가지를 뛰어다니며 울고 있었다.

그 새소리도 보옥의 마음처럼 한편으로는 구슬프게 들리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청아하고 밝게 들리기도 하였다.

공자의 제자였던 공야장은 이 세상의 모든 새소리를 알아들었다는데
그가 옆에 있다면 제 새소리에 대해 물어볼 수도 있을텐데.

새소리를 알아듣는다면 우리 인간의 마음 깊은 곳의 소리도 알아들을 수
있지 않을까.

보옥이 좀 엉뚱한 생각을 하며 그 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새가 놀란 몸짓으로 후르륵 저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새가 무엇에 놀랐는가 살펴보니 새가 날아간 자리에 불길과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