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간 중남미지역에서 사업을 하면서 가장 절실히 느낀 것은 자기브랜드
가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저도 이나마 사업기반을 갖출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고유브랜드를 키우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 덕분이지요"

열대의 태양이 일년내내 눈부신 미국 카리브해 연안의 아름다운 휴양지
마이애미.엑셀(Excell)사 배재우사장에게 이곳은 멕시코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등과 바다로 연결된 중남미 진출의 교두보다.

배사장은 이곳에서 전구 안경테 등 한국제품들을 수입해 "하나(JANA)"라는
고유브랜드를 달아 바다 건너 중남미 각지로 수출하고 있다.

"10년 이상 고유브랜드로 사업을 하다보니 이제 이곳 중남미나 마이애미
에서 "하나전구" "하나안경테"라면 누구나 질좋은 한국산 제품으로 인식하게
됐지요"

중남미는 얼마전까지 "실패한 경제의 표본"으로 세계의 손가락질을 받아
왔지만 최근에는 기회와 도전의 땅으로 변모하고 있는 곳.

무궁무진한 천연자원과 국민들의 경제재건 의지로 80년대에 비해 2배이상
높은 연평균 3.5~4.0%의 고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고질병이었던 연 수천%의 인플레도 10% 선으로 끌어내렸다.

관세도 80년대의 50%대에서 10~13% 정도로 낮췄을 정도로 무역자유화
바람이 불어 해외투자가 밀려들고 있다.

배사장은 이러한 중남미 시장의 급속한 팽창에 발맞추어 최근 멕시코에
새로이 현지법인을 설립하는 등 순조롭게 사업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30년전 아르헨티나에서 처음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그가 항상 지켜온
경영철칙은 "신뢰"라는 한 단어로 요약된다.

"하나"라는 고유브랜드를 개발해 그 이름을 갈고 닦기 위해 노력해 온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중남미 현지인 거래선들과 친형제와 다름없는 친분을 쌓아온 것도 "신뢰
구축이 모든 사업의 우선이 된다"는 그의 신념과 무관치 않다.

그가 한국에서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곳은 섬유전문 무역회사.

60년대 중반 국내에서는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할만한 직장이 많지 않았다.

번듯한 직장이라야 공무원 은행 국영기업체 정도.

지방대학을 나온 배사장에게 취직의 문은 좁기만 했다.

어렵게 섬유전문제조업체 K상사에 취직하기는 했지만 성에 차질 않았다.

또 배사장이 평소 가지고 있던 대외지향적 "끼"도 직장생활을 더욱
재미없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가까운 친구가 "남미로 함께 이민을 가자"는 제의를 했다.

기다렸다는 듯 직장을 정리해 아르헨티나로 이민 보따리를 쌌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인 66년.

배사장이 아르헨티나에서 취직한 곳은 한 자동차회사.

감독관업무를 맡았지만 역시 샐러리맨 체질이 아니라는 것만 깨달았을
뿐이다.

그래서 2년간의 계약근무를 마치자마자 회사를 그만뒀다.

새로운 사업인생의 시작이었다.

그가 첫번째 손댄 사업은 한국산 숄 수입업.

당시 우리나라 섬유산업이 한창 일어날때라 값싸게 사들여 두둑한 마진을
얹어 팔 수 있었다.

돈도 꽤 벌었다.

하지만 군사정권인 아르헨티나의 정정에 늘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첫번째 사업무대를 옮기게된 이유다.

콜롬비아로 이주한 것은 지난 69년.

껌 송이버섯 등 식품을 비롯 일반 상품 섬유제품 등 닥치는대로 한국
제품을 수입해 팔았다.

당시 배사장은 국내 B종합상사의 현지에이전트를 맡기도 했고 무공(KOTRA)
으로부터 명예 무역관장으로 위촉을 받아 국내 중소무역업체와 현지바이어를
연결해 주는 거래 알선업무도 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기브랜드 개발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고 말한다.

국내 산업을 이해하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했다.

제3국간 거래방법을 터득한 것도 이 기회를 통해서였다.

그는 사업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다시 한번 본거지를 옮기게 된다.

중남미시장 전체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콜롬비아의 정보력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74년부터 설립 운영해 오던 콜롬비아의 현지법인 하나사를 제3자에게
관리토록 하고 중남미 사업본부라 할 수 있는 모기업을 82년 마이애미로
옮겼다.

취급품목도 종전의 백화점식을 탈피하고 조명기기와 안경테 등으로 전문화
했다.

최근에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출범 이후 멕시코시장을 관리하기
위해 94년 멕시코 현지법인도 신설했으며 거래선을 중남미 및 카리브해
연안국가로 다변화했다.

그가 취급 품목을 전구 등 조명기기 위주로 전문화한데는 이유가 있다.

전구란 소모품이어서 수입수요가 지속적이다.

유통구조가 전문화 되어 있어 제3자의 신규진입이 어려울 뿐 아니라 우리
교민들과의 과당경쟁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에게 "빛"을 전해 준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배사장이 전구를 주력
제품으로 택한 하나의 이유라고 한다.

그가 나름대로 시장을 성공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역시 자기
브랜드를 일찍부터 개발해 관리해온 때문이다.

"주문자상표 부착생산(OEM)방식을 고집하다간 바이어가 거래선을 바꾸면
하루 아침에 시장기반을 잃게 됩니다. 또 이곳저곳의 바이어를 찾아나서야
하지요. 10년 이상 얼굴없는 상품에 대한 비애를 절실히 느낀 것이 고유
브랜드를 만들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입니다"

그래서 고안해낸 것이 "하나"브랜드.

친자식을 키우듯 정성을 다해 키워 갔다.

홍보매체를 통한 광고도 게을리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철저한 애프터
서비스를 원칙으로 거래선을 관리했다.

조금이라도 하자가 있는 상품은 전량 교환해 주는 방법을 처음부터
계속해온 것.

기존 거래선과의 관계는 더욱 공고해졌고 신규거래선도 점점 늘어갔다.

최근 그는 매우 기분 나쁜 일을 당했다.

우리나라의 한 중소기업이 "하나"브랜드를 도용해 콜롬비아로 물건을
수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배사장은 물론 그의 기존 거래선에서도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고서야 법률적 조치 없이 일을
마무리지었지요. 그렇지만 매우 씁쓸한 기분이었습니다. 남이 힘들게 개발한
브랜드를 도용해 이익을 챙긴다는 것은 남의 농장에서 과실을 따가는
도둑질과 같질 않습니다"

국민소득 1만달러를 넘어 선진 경제권으로의 진입을 바라보는 우리나라의
상도의가 여태 이런 수준인가 개탄했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중남미의 관문이라는 마이애미의 지리적인 이점을 철저히 이용하고
있다.

한국에서 수입하는 상품들을 컨테이너 베이스로 마이애미의 보세구역으로
들여온 다음 콜롬비아 멕시코 베네수엘라 및 카리브연안국으로 재수출한다.

소액소량의 주문에도 적극 대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항공으로 가져오는
것보다 가격경쟁력도 높일 수 있는 방법이다.

특히 중남미 대부분 국가의 수입과표가 본선인도가격(FOB)이 아니라 운임
보험료 포함가격(CIF)이기 때문에 마이애미에서 선적할 때 운임 및 보험료
부담이 적은 강점을 갖고 있다.

그가 국내에서 들여가는 상품은 연간 600만달러 규모로 많지는 않다.

한국제품의 가격경쟁력이 점점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꾸준히 한국물건을 취급한다는 공로로 지난해 3월 상공인의 날에는
통산부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20대의 젊음만을 담보로 무작정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중남미 16년, 미국 14년 등 모두 30년을 해외에서 보냈습니다"

그가 젊음을 바쳐온 그의 사업은 이제 반석위에 올라섰다.

그가 자식만큼 아껴온 "하나"브랜드도 어엿한 중남미의 중견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그가 이곳에 뿌린 땀방울에 결코 후회란 없다.

그는 국제화를 추구하는 한국의 젊은이들이나 중소 기업인들에게 항상
"신뢰를 중시하라"고 강조한다.

사람의 감정이란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특히 중남미 현지인들과 무역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먼저 인간적으로
터놓고 지내라"는 말부터 시작한다.

지난 30년간 중남미시장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 김주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