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영 < 쌍용할부금융 사장 >

스위스는 너무 아름답다.

어떤 여성관광객은 그 아름다운 경치를 서울에 두고 온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보지 못하는 아쉬움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경치보다 더 오래 가슴뭉클하게 기억에 남는 것이
있으니 바로 루체른시에 있는 사자 위령비이다.

1792년 루이 16세의 궁전을 지키다 전멸한 800명의 스위스 용병을 추모하여
큰 바위에 새긴 사자 석상인데, 큰 사자 한마리가 여기저기 온몸에 화살을
맞고 신음하면서 빈사상태로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모습이다.

그 당시 스위스는 너무 가난했다.

남정네들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이웃나라에 용병으로 팔려 갔다.

그들에겐 누구를 위해, 왜 싸우느냐 하는 대의명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형제나 부자간에도 편이 다르면 서로 활을 쏘고, 일단 계약한 자기
주인만을 위해 신의와 용맹을 다하여 싸웠다.

오늘도 나는 퇴근 길에 명동성당 앞을 지나면서 절규하는 시위 군중을
본다.

그럴 때면 문득 루체른의 사자상을 떠올리게 된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직장과 학업을 팽개치고 저렇게도 절규하며
시위하게 만드는가.

정치적으로는 이제 우리도 두번에 걸쳐 자유로운 직선으로 대통령을
뽑을 만큼 민주화가 되었다.

87~94년 동안 경제적으로 우리나라의 실질 임금상승률은 주요 선진국의
5배나 될 만큼 근로자들의 지위가 향상되었다.

그리고 이념이니, 사상이니 하지만 소련의 공산 체제는 생산성이 사회
비용을 따라잡지 못한 나머지 제풀에 무너지는 것도 목격했다.

스위스 용병들은 대의명분을 희생하고 경제를 얻어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민주화니, 근로 조건이니, 이념이니 하는 각양각색의
명분을 앞세운 지나친 투쟁으로 경제를 잃고 있다.

이제는 우리 모두 사회가 수용하기 어려운 개인의 주장일랑 유보하고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한다.

그러면 10년이 걸릴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5년으로 앞당겨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