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달밝은 밤에/밤늦게 노닐다가/들어와 자리보니/가랑이
넷이어라..."

"삼국유사"에 처용설화와 함께 전해지는 이 향가는 처용이 지어불렀다는
노래다.

그러나 동해용의 아들로서 신라의 관직까지 받았다는 "처용"이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남자무당"이니, "호족의 아들" 아니,
"화랑"이니 학자마다 해석이 구구각색이다.

그런데 1969년 사학자 이용범교수가 "처용설화"를 새롭게 해석한
논문 한편을 "진단학보"에 발표했다.

처용은 기록에 표현된 용모나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아라비아상인중
한 사람이었고 당시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는 동해를 통해 세계 각국의
상인들이 드나들었던 동양의 국제무역도시였다는 논문이었다.

고고학자 김원용 교수도 이교수의 견해에대해 경주에서 출토된 페르시아
양식의 유물들을 예로들면서 충분히 그럴수도 있다는 논평을 해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논문을 쓴 이교수나 논평자인 김교수는 모두 하나의 "가설"로서
조심스럽게 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을뿐 그런 가설을 뒷받침할 만한 분명한
논증을 하지는 못하고 타계했다.

이 "가설"을 사실로 구명해냈다는 인물이 모하메드 칸수라는 인물이다.

그는 9세기께 아랍의 고서인 "제도로와 제왕국지"에서 처용이 나타났던
개운포가 9세기 당시 아랍세계와의 국제교역항이 었으며 그곳으로부터
아랍에서는 인삼 은장도 옷감 도자기등을 수입한 사실을 밝혀냈다고
확언했다.

그는 또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검토한 결과 혜초가 대식국
(아라비아)을 방문한 것이 분명하다는 엉뚱한 주장을 펴면서 "신라는
이슬람 세계에서는 신비의 왕국으로 알고 있던 실크로드의 동쪽끝이었고
처용과 혜초는 신라와 이스람교류의 산 증인들"이라고 공언해 한국인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칸수의 저서나 논문을 보면 그가 아랍어와 아랍사를 다 알고 있다는
사실만 빼놓으면 대부분 이 추론이고 억지투성이다.

원래 고대사란 귀에걸면 귀고리 코에걸면 코러리라지만 그의 박사
학위논문을 어떤 이들이 심사했는지 의심스러운 지경이다.

그가 "대식고"라는 논문을 냈더니 어떤 학술지 편집자가 "많이 먹는
것을 고찰한 논문쯤으로 알고 있더라는 그의 경험담 처럼 아람역사에
대해서는 아직 캄캄한 것이 우리학계의 실정이니 하는 말이다.

칸수가 남파간첩 정수일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가 간첩이었다는 것도 충격적인 일이지만 외국인이 찬란했던 한국
고대사를 무조건 칭찬만 해주면 맥을 못쓰는 비학문적인 우리학계의
풍토가 더 큰 충격으로 닥아온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