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쪽 일등"

세계 반도체 업계에선 한국 반도체 산업을 이렇게 부른다.

일등이란 메모리 분야에서 세계 선두에 서 있다는 것을 뜻한다.

문제는 그 앞에 붙은 "반쪽"이란 말이다.

반쪽이란 말은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을 때 쓰이는 용어다.

그러니까 한국 반도체 산업은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을 못갖고
있다는 뜻으로 통한다.

바로 이게 비메모리 분야 기술이다.

결국 한국 반도체 산업은 해외업계로 부터 절름발이로 취급당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업계는 반쪽 일등에서 명실상부한 일등이 되기 위해 주목할 만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해외 업체와의 전략적 제휴로 기술을 수혈받는 한편 기술개발 체제를
비메모리 중심으로 전환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

삼성전자가 지난달에 미국 덱사와 알파칩을 공동개발하기로 한 것이
대표적 예다.

삼성이 이 회사와 손잡고 개발할 알파칩은 CPU라고 불리는 컴퓨터
중앙처리장치다.

대표적인 비메모리 반도체로 바로 세계 반도체와 PC업계를 주무르고 있는
인텔의 대표상품이다.

삼성의 이번 제휴가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앞으로 "삼성" 브랜드를 붙여
이 제품을 팔기로 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국내 업체가 외국회사와 기술제휴를 할 경우 OEM(주문자상표 부착
생산)으로 공급하는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삼성은 이번에 그같은 관행을 깼다.

단순히 매출을 올리자는 게 아니라 비메모리 사업을 육성할 수 있는
자생력을 키우자는 목적에서다.

삼성은 오는 2000년까지 세계 5대 비메모리 업체로 성장한다는 목표도
세워 놓았다.

현대전자는 이미 액션에 들어갔다.

지난 94년 3억4,000만달러를 들여 미국의 비메모리 전문업체인 AT&T-GIS사
를 인수한 것.

현대는 심비오스 로직으로 이름을 바꾼 뒤 사업구조 등을 일신했다.

"내년부터는 이 회사가 절대적인 공헌을 할 것"(김주용 현대전자 사장)
으로 기대하고 있다.

LG반도체 역시 일찌감치 비메모리 분야의 기술력 확보에 나섰다.

국내업체중 가장 먼저 회로 선폭 0.5미크론m(1미크론m는 100만분의 1m)급
ASIC(주문형 반도체)를 개발했다.

세계 15개 지역에 세우기로 한 R&D센터도 비메모리 반도체 제조 기술
확보를 목표로 한 것이다.

국내업체들이 이처럼 비메모리 분야 사업 육성에 힘을 쏟는 이유는
두가지다.

첫째는 안정된 사업 구조를 만들자는 것.

메모리 반도체는 사실 투자 위험이 매우 높은 분야다.

조단위의 투자를 하고 단기간에 투자자금과 이익을 뽑아내야 한다.

시장 상황이 악화될 경우 엄청난 손해를 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메모리와 비메모리의 사업비율을 균형있게 발전시키는 것은 반도체
사업의 "ABC"로 통한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가 휘청거릴 경우 비메모리로 떠 받쳐주는 포트폴리오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뜻이다.

일본 반도체 업계는 이 원칙을 충실히 지키고 있다.

대부분의 업체들의 메모리와 비메모리 반도체의 사업비율은 6대 4정도다.

그러나 한국 업체들은 비메모리 분야가 전무하다시피 하고 있다.

지나친 메모리 의존도로 인해 한국 반도체 산업은 "모래성"과 같다는
비아냥도 받고 있다.

그래서 "메모리에 너무 많은 부하가 걸려있다는 것"(반도체 산업협회
김치락 부회장)이 한국 업계가 시급히 개선해야 할 점으로 지적돼 왔다.

한국 업계는 늦게나마 메모리와 비메모리를 균형있게 육성하기 위한
힘나누기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비메모리 반도체를 육성하려는 또 다른 이유는 이 제품이 메모리와 비교할
수 없는 고부가가치 제품이라는 점이다.

반도체는 그 종류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중에서 비메모리는 메모리 반도체와는 달리 표준규격이 없다.

특수한 용도를 겨냥해 만들기 때문에 일정한 제품 규격을 정한다는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대량생산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특수한 용도의 제품을 소량으로 만들어 파니 값이 비쌀 수 밖에 없다.

또 인텔처럼 비메모리 반도체 하나로 세계 반도체 업계와 컴퓨터 업계를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파워를 갖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메모리 반도체를 양떼기 해도 잘나가는 비메모리 반도체 하나를
당할 수 없다는 게 실증되고 있는 셈이다.

어쨌든 국내업체는 비메모리 강화라는 해묵은 숙제를 하기 위한 해법마련에
나섰다.

그 숙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느냐에 따라 한국 반도체 산업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 분명하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