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15대국회가 선거를 치룬뒤 100여일 가까이 공전하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 독일의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너지는 최근 "완력에 의해 유지되는
동아시아 민주주의의 곤궁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고
꼬집었다.

다행히 심야의 총무회담이 "극적 타결"을 이끌어 내 민주주의가 "파업"을
끝내고 4일 의장단을 선출하는등 국회는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기는 했다.

한시적으로 운영될 예정인 국정조사특위와 제도개선특위가 여야구성비율
이나 안건등으로 미루어 보아 또다시 비생산적인 여야의 강경대치를 재현할
요소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늦었지만 원이 구성됐으니 이제 외국일간지의 비판쯤이야 넘겨 버릴 수
있지 않느냐는 주장도 나올 법 하다.

그러나 국회공전의 과정을 되돌아보면 다행스럽게 생각할만한 일은 아니다.

민의를 대표한다는 국회의원과 그들이 소속한 정당이 보여준 모습은 실망
스럽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기회가 있을때마다 우리의 정치는 4류라는 지적이 있었지만 개선된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의 정치는 그저 사람만 달라졌을뿐 본질은 "패거리정치"의 영역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민의 기대와 바램을 한몸에 받으며 출범한 문민정부최초의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그 어느때보다 많은 신인정치인들을 당선시켰다.

과거와는 다른 진정한 민의의 대변자가 되어달라는 간절한 소망의 표현
이라고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이같은 바램을 여지없이 뭉개버리고 14대에 이어
또다시 상당한 기간동안 국회개원조차 하지 못했다.

교과서적인 설명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핵심은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를
골간으로 하는 3권분립이다.

그중에서도 정부의 일방통행식 행정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국회의
기능은 어떤 상황에서도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난 시절 비상계엄하에서 국회의 문을 닫아버린 정권에 대한 비판이
강한 것은 여러가지 이유중에서도 바로 정부에 대한 견제기능을 가진
기관의 활동을 정지시켜 버렸다는 점에 있다.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입법기관이고 장관급 예우를 받고 있는 것은 이런
민주주의의 정신 때문이다.

왜 이같은 비상식이 상식으로 되어 버리고 끝없이 되풀이 되는 것일까.

이번의 경우에는 선거결과를 인위적으로 바꿔 버린 여당에게 많은 책임이
돌아간다.

여당은 조금도 불법적인 요소가 없었고 정당한 정치행위였다고 강변하지만
과반수를 넘기기 위한 여당의 행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욕심의 표현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국회의원당선자라도 부정선거행위가 입증되면 무조건 처벌하겠다는 정부의
입장발표에 이어 일부 무소속이나 야당 후보자에 대한 고발조치등은 여당에
입당하지 않을 경우 어렵게 얻어낸 여의도입성기회를 빼앗아 버리겠다는
선전포고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해서 여당은 과반수를 넘어버렸고 이를 토대로 여당의 협상자세는
강경해졌다.

과반수에 미치지 못하는 야당이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뼈저린
경험을 갖고 있는 야당의 자세도 그저 옛날 방식을 되풀이 하는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여야합동으로 만들어낸 민주주의의 파업은 누가 더 오래 버틸수 있는지
인내력을 시험하는 장으로 변했고 언제나처럼 여야 모두 약간의 전리품을
챙기고 끝났다.

그동안 그들을 대표로 뽑았던 유권자들은 오르는 물가 갈수록 심해지는
환경공해 교통난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고스란히 몸으로 버티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국회가 열린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회의 존재란 이런 문제들을 지적하고 정부에 개선책을 촉구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는가.

그것이 소박한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늦었지만 이제 국회는 정상화됐다.

큰 포부를 갖고 처음으로 여의도의사당에 들어온 초선의원은 물론이고
과거의 관행에 물든 노련한 정치인들 모두가 이제는 관행처럼 되어버린
소모적인 정쟁에서 벗어나 진정한 입법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찾아주기 바란다.

민주주의란 파업을 해서도 안되고 할 수 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민주주의를 제대로 굴러가게 하는 주역은 국회의원인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