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로라고 하면 흔히 육로를 생각하지만 산과 하천이 많은 지형
때문에 도로사정이 변변치 못했던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강의 수로는 물론
해상교통에 크게 의지해 왔다.

특히 현물로 받은 각 지방의 조세를 왕도에까지 운반해야 했던
왕조시대에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수송수단인 수로나 해로를 이용하는
조운제도가 정착되어 국가발전의 큰 몫을 해냈다.

고려왕조는 초기부터 남방 연해안과 12조창을 두고 세곡을 예성강
입구에 있던 경창으로 운송했다.

"고려사"를 보면 충주 원주 아산 서산 부안 임피 나주 영광 영암
순천 사천 창원에 12조창이 설치됐다.

한강변 충주 덕흥창에는 21쌍, 원주의 흥원창에는 23쌍의 조선이
운송을 맡았다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에는 세곡수송을 대부분 조운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고려왕조가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도로 쫓겨 들어가 38년이란
긴 세월을 버틸수 있었던 것도 조운에 의해 안전한 해상통로를 거쳐
들어오는 조세수입이 여전했던 때문이다.

또 고려의 멸망 이유중의 하나가 거의 폐지되다시피 했던 조운제도의
몰락 때문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이야기이고 보면 국가의 흥망과도
직결됐던 해상교통로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된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세운뒤 제일 먼저 단행한 것도 전제개혁에
이은 조운제의 재정비였다.

그가 한강을 끼고 있는 한양을 수도로 택한 것도 역시 조운을 염두에
둔 선택이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왕조의 조창은 9개로서 그중 4개가 아산
용안 영광 나주 등 바닷가에, 3개는 한강변에, 2개는 이북인 황해도
지방에 위치했다.

전체 세곡의 반이상이 해로를 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해상운송은 그만큼
중요했다.

그러나 다도해인 해안의 항로가 불량한 것이 흠이어서 해난사고가
빈발했다.

태조때부터 운하의 건설이 심도있게 논의되는 것도 그때문이다.

제일제당과 한진이 교통체증에 따른 믈류비용을 줄이기 위해 매일
2000t급 컨테이너선 4척을 인천~부산간 항로에 운행키로 했다고 한다.

육로보다 물류비용이 t당 22%나 절감된다니 비용절감 효과도 예상보다
크다.

때마침 수자원공사에서도 이달부터 한강~낙동강운하의 타당성 조사를
시작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옛날처럼 수로와 해로를 다시 활용할 시대가 점차 다가오는 것일까.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