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언 우리 모임도 강산이 한번 바뀌는 10년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입사한지 19년째, 처음 10년은 어떻게 지냈는지 모를 정도로 시샛말로
눈썹이 휘날리게 뛰어 다녔는데...

어느 순간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세상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회의가
들면서 사내의 동료들 20여명과 같이 결성한 친목단체가 어주조회이다.

설립 취지는 매일같이 현장을 뛰어다니며 일에 대한 대화만 나누다보니
상대방이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로보트러첨 보이는 현상을
해소하기 위함이라고 정했다.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필히 가족동반이라고 정해놓고 만약 혼자
참석을 하게되면 벌금을 거두었는데 사실 그렇게 정한 것이 필자라
두고두고 후회를 하였다.

어쨌든 필자는 그벌금을 무는 전문가로 7~8년을 성장하여 최근 1년은
한푼의 벌금을 물지 않은것이 자랑아닌 자랑이라 할수 있다.

처음 4~5년간은 산행과 낚시를 하였는데 그때의 재미있었던 일을
한가지 소개한다.

설악산에서의 일이다.

한여름이라도 산에서의 저녁 무렵은 상당히 춥다.

그런데 멋있는 아가씨가 혼자서 우리가 텐트를 쳐놓은 근처를 왔다갔다
하는것이 아닌가.

물실호기...

사연을 알아보니 서울 산악회 소속인 그녀는 회원들과의 보조를 맞추지
못하여 공룡능선에서 낙오되어 내려오는 중이라나.

산장은 가득차서 누울 곳이 없고, 마침 우리동료들이 텐트를 치는것을
보니 3개를 갖고있어 왔다갔다 했노라고.

그당시 등반에 참여한 우리인원은 5명.

텐트 한개는 짐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고 1개에는 4명, 1개는 2명이 잘수
있는 크기였다.

침낭을 두개씩 갖고 온 사람은 없었으니 천상 1사람이 잠을 같이
자야할 모양이었는데...

서로서로 양보를 하다가 결국은 지금같이 근무하고 있는 모차장이
그녀와 잠을 자게 되었는데 아침에 부시시 눈을 뜨고 나온 그에게 나머지
4명이 "좋은 아침!"이라고 외칠때 그 친구의 계면쩍은 얼굴 모습이라니.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미소가 절로 나온다.

다음에는 주로 다녔던 곳이 용인에 소재하고 있는 주말농장으로
후손들에게 땅의 고마움을 알게 해주자는 의미에서 선택하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결정은 상당히 현명했던것 같다.

밭을 호미로 직접 일구고 여름에는 그 밭에서 나는 작물로 점심식사를
하니...

굵은 고추와 된장, 상추와 쌈장, 호박과 비빔밥.

이렇게 쓰다보니 혀밑에서는 어느새 침이 괸다.

산에 오르고 주말농장을 가꾸고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수 있는 건강을 지킬수 있었고 가정의 행복을 꽃피울수
있었다.

회사일에 대한 상하좌우의 업무에 대한 협조는 물론이요, 지금은 인생의
동반자 역할까지 해주는 좋은 친구들이 되었으니...

여러분께도 이런 모임을 만들어 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