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국가경제의 경쟁력을 좌우할 정보화사회 진입을 앞두고 우리나라
정보통신산업의 과거 현재 미래를 조명하는 것도 산업발전을 위해 상당한
의의를 갖는다고 할수 있다.

한국경제신문은 정보통신기술의 꽃으로 불리는 전전자교환기(TDX)와 최첨단
CDMA(부호분할다중접속)방식의 디지털이동전화시스템 개발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면서 국내정보통신기술의 산증인으로 꼽히는 한국이동통신 서정욱
사장의 "정보통신발달사-군용무전기에서 PCS까지"의 글을 매주 1회 시리즈로
연재한다.

< 편집자 >

=======================================================================

*** 서정욱 < 한국이동통신 사장 >

약력 : 1934년 서울생
서울대 공대 전기공학과 졸업
미 텍사스 A&M대 공학박사
공군사관학교 주임교수
국방과학연구소 소장
대한전자공학회 회장
한국전기통신공사 부사장
과기처 차관
정보통신부 전화통신기술개발 추진협의회 의장
KIST 원장

=======================================================================


나는 요즘도 새벽 다섯시면 어김없이 일어난다.

그리고는 곧 바로 컴퓨터 앞에 앉아 워드 프로세서로 밀린 원고를 작성
한다.

별일이 없으면 이 작업은 출근 준비 전까지 계속된다.

나는 이 시간을 꽤 오랫동안, 내가 소비한 다른 어떤 시간에 못지 않게
소중히 여겨 왔다.

편하게 말해서 성격 탓에, 남다르게 돌이키고 뉘우칠 일이 많은 내가
스스로를 곰곰이 되짚어 보는 시간도 이때이고, 때때로 스메타나의
"몰다우 강"이나 시벨리우수의 "핀란디아" 같은 음악을 들으며 하루를
위한 명상에 잠기는 시간도 바로 이 때이다.

외롭고 힘들던 유학 시절에 위안삼아 즐겨 듣던 이 음악을 나는 지금도
즐겨 듣는다.

마치 조국 폴란드를 생각하며 조국의 흙을 떠갔던 쇼팽의 마음처럼, 이
음악들은 분단된 나라의 한 젊은 유학생이 품었던 조국에 대한 벅찬 감정과
학문에 대한 열정을 지금도 고스란히 전해주기 때문이다.

이 시간이면 나는 이런저런 인연으로 청탁받은 글을 쓴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나는 신문과 잡지 등에 꽤 많은 글을 써 왔다.

급속한 과학 기술의 변화로 내가 전공한 정보 통신 분야가 주목을 받은
탓도 있지만,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품이 결국은 많은 글을 쓰게
만든 듯하다.

글쓰기는 곧 공부다.

처음부터 그럴 의향은 아니었겠지만, 나는 나에게 글 공부를 시켜준
여러분께 늘 감사한다.

나는 결코 한가롭게 살지는 않는다.

그러면서 왜 바쁜 일정을 쪼개 글쓰기에 매달렸을까?

그 이유를 몇가지 더 들 수 있다.

하나는 기록을 남겨 두어야겠다는 생각에서이다.

물론 기록된 것만이 역사는 아니다.

그러나 기록하지 않는 민족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역사의 교훈을 우리는
종종 간과한다.

여기에 인쇄 매체에 대한 믿음을 덧붙일 수 있다.

최근들어 영상이나 음향같은 다양한 미디어가 크게 각광을 받고 있지만,
나는 그로 인해 활자 문자가 타격을 받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활자 문화는 그대로의 매력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정보 통신 분야에 눈을 뜨기 시작한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내가 썼던 글들의 대부분은 정보화 사회에 대한 우려와 기대와 미래의 꿈에
부풀어 있던 "나"와 "너"와 "우리"에게 바쳐졌다.

더러 의욕에 미치지 못한 글들이 종종 나를 부끄럽게 만들지만, 글쓰기는
공학도의 커뮤니케이션의 통로로서 가장 적합한 수단이라는 믿음은 지금도
그대로이다.

게다가 한번 발표된 글은 끊임없는 자기 확인과 그에 따른 책임감을 요구
하기 때문에 게으름이나 망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늘 마음에 새기고 있지만 말보다는 글쓰기가 어렵고 글쓰기보다는 행동이
어렵다.

이번에 나는 우연한 기회에 한국경제신문사로부터 새로운 청탁을 받았다.

그 청탁의 내용은 그동안에 내가 우리나라 정보 통신 분야에 몸담으면서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일들을 회고해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69년 이후, 줄곧 정보 통신 산업의
현장에서 살아왔다.

그것도 우연찮게 시대의 요구와 과학 기술의 진보, 정보 통신 산업의 변화
에 따라 대학과 국책연구소 공기업 정부기관 개인기업등을 두루 경험하였다.

아무리 겸양을 부려도 3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정보통신분야라는 외길을
걸어온 사람으로서 어찌 하고 싶은 말이 없으랴.

그러나 이만한 글을 쓸 충분한 자격과 경륜을 갖춘 출중한 선배들이 꽤
여러분 계시다.

아마 그분들의 결단과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의 정보통신
산업은 오늘과 같은 발전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짐작하건대 보다 더 현장에 가까이 머물며 동분서주했었다는 이유로 이런
기회가 내게까지 미뤄진 듯하다.

그분들의 넉넉한 배려에 늘 고마움을 느낀다.

최근 독서계에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사에 대한 일련의 저서들이 화제가
되고 있다.

그 책들을 읽으며 나는 그녀에게 적잖은 호감을 가졌다.

역사란 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어려운 것도 케케묵은 것도 아니며 다만
자신들이 태어난 시대를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의 기록이라는 그녀의 입장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역사란 실체이며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축적된 결과물이다.

과학의 역사를 기술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접하는 과학사는 흔히 뉴턴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뛰어난 사람들을
끌어내어 쓰는 일이 많다.

그래서 과학이 발전하려면 새로운 발견과 이론이 나와야 한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보다 더 진실한 것은 과학이 발전하려면
무엇보다도 새로운 도구, 새로운 재료, 새로운 공작법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대부분 걸출한 천재 과학자가 아닌 장인으로서의
불굴의 노력과 정신을 갖춘 많은 과학 기술자들에 의해 개발되고 발명되었다.

과학적 지식을 더 나은 삶을 위한 실용적 가치로 전환시켜 놓은 이들을
우리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나는 그동안 내가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우리나라의 정보 통신 기술의 발전
을 회고하면서 가능한 많은 부분을 그 터전을 갈고 닦는데에 희생한 많을
과학 기술자들의 노고를 담는데 할애할 것이다.

그때 못다 했던 이야기,진실하면서도 어쩌면 사소한 것들에 대해 꾸밈없이
이야기 하련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오늘을 열심히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비로소 "살아
있는 역사"로서 좋은 교훈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과 함께 지나가버린 일들을 낱낱이 기억하는 일은 가능한
일도, 가치있는 일도 아니다.

나는 다만 때론 상심하고 때론 더없이 보람찼던 내 기억의 선택된 부분이,
정보통신 분야의 어제와 오늘을 아우르는 가장 확실한 반성적 고백으로 더
나은 내일의 기틀이 되기를 희망한다.

나는 1934년 11월 14일, 14대째를 이어 살아온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태어났다.

일가 친척들이 살던 곳까지 넓히면 청진동 가회동 명륜동 등이 소년 시절의
생활권이었으며 조금 멀리는 서대문까지 이르렀다.

이제는 찾기도 꽤 힘든 알짜 서울 토박이인 셈이다.

지금은 서울이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땅이 되었지만 내가 나서 자라던
때의 서울의 인구는 불과 1백만을 오르내렸다.

그 인구의 편차만큼 우리나라의 정보통신산업 또한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근대적인 형태의 전기통신은 1845년 모스가 전신기를 발명하면서 시작
되었다.

이어 1876년에는 벨이 전화기를 발명하고 1896년에는 마르코니가 무선
전신기를 발명하면서 인류의 통신수단은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우리나라는 모스가 전신기를 발명한지 40년째인 1885년 전기 통신기술의
도입을 정식으로 결정했고 전화기는 벨의 발명이후 6년만인 1882년 유학생에
의해 최초로 도입되었다.

물론 나는 우리나라에 통신기술이 도입된 과정을 세세히 나열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같은 비교적 빠른 통신기술의 도입이 당시 일본과 청나라 같은
외세의 우리나라에 대한 주도권 싸움에 의해 가열되고 자극되었다는 점만을
말하고자 한다.

예컨대 1905년 일제가 우리나라의 통신 시설을 강점하고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압적으로 "한일 통신 협정"을 맺고나서 몇 달 뒤에 을사보호
조약을 체결한 것을 보더라도 일제가 한국의 강점과 대륙 침략에 통신
시설을 얼마나 용의주도하게 이용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나서 자란 일제 강점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27년에 경성 방송국이 개국되고 38년에는 일본과 만주 사이에 무장하
케이블을 포설하는 대역사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우리나라의 산업을
일으키거나 민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일제는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기지로 만든다는 목적에서 통신망을 확장
했으며 그 시설과 설비를 다룰 수 있는 기회 역시 한국인에게는 제한했다.

게다가 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이후로는 통신을 "제2의 국방"이라
하여 방위 통신 산업으로 개편함으로써 일반인의 통신을 막았다.

언젠가 나는 진주만 기습 공격에 관한 전사 자료를 접하고 "전자전 측면
에서 본 진주만 공격"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당시 일본군에 의해 이루어진 진주만 기습 공격은 철저한 전파 전쟁의
승리이며 전형적인 고전적 정보 전쟁의 사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그 요지
였다.

이처럼 당시의 일제는 전쟁 수행에 관한 한 상당한 전파 기술과 운용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그 뒤에 일어난 월남전이나 걸프전을 보더라도 전자통신은 현대
전쟁에서 더욱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2일자).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