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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칠줄 모르는 전세계의 기업가들은 병들어가는 세계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한편 새롭게 부를 창조할수 있다는 기회를 실증해 보이고 있다.

미국의 경제학자 레스터서로는 최근 저서 ''자본주의의 미래(The Future of
Capitalism)''에서 테크놀로지 발전과 공산주의 몰락이 사업가들의 세계를
더욱 넓게 열어주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미 경영월간지 ''석세스(Success)''지는 기업가정신에 철저했던 11명의
세계적 기업가들을 선정, 이들이 부를 축적하는 과정과 어떤 궤적을 통해
세계 경제를 변형시켜 왔는지를 소개했다.

석세스지는 각국 대사관 상무 담당관과 업계지도자 정상급 언론인및
기업가 단체장을 상대로 실시한 조사를 통해 이 기업가들을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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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사요시 손 : 일본 ]]]

재일 한국인인 마사요시 손은 20세가 되기 전에 이미 백만장자였다.

버클리 재학 시절 포켓용 번역기를 발명해 샤프사에 100만달러에 팔았기
때문이다.

이 번역기는 나중에 샤프 위저드로 발전했다.

그는 또 미국에서 소프트웨어회사를 설립해 성공시킨 뒤 200만달러에
매각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손은 어머니께 공부가 끝나고 돌아오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손은 일본의 대다수 대학 졸업자와는 달리 대기업에 취직하는 대신 스스로
기업을 설립키로 했다.

귀국후 첫 1년동안 그는 40개 이상의 사업구상을 마련해 자신이 설정한
엄격한 25가지 기준에 맞추어 이를 검토해 나갔다.

손은 적어도 50년이상 관심을 유지할 수 있는 장기적인 사업, 10년 이내에
업계 넘버원이 될 수 있는 사업을 찾았다.

그리고 자신이 40세가 되기 전에 매출액 10억달러를 올릴 수 있는 잠재력이
큰 사업을 선택키로 했었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소프트웨어 보급사업이었다.

그는 소프트뱅크사를 설립했고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됐다.

지금은 일본내에서 판매되고 있는 모든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50%는
소프트뱅크사를 거쳐가고 있다.

소프트뱅크사는 6,000여 직원들에게 주식을 배당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본 기업으로서는 혁신적인 조치였다.

손은 모든 직원을 10명단위의 개별 팀으로 만들어 600여개에 달하는
가상 단위기업으로 조직했는데 이를 통해 각 단위가 신속하고도 역동적인
의사결정과정을 통해 신속하게 시장에 대처할 수 있도록 했다.

부모가 모두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일본 사회에서 이방인 취급을 당해 온
손은 관습과 전통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게 된 것도 이같은 이방인신분
때문이었다고 설명하고 새 시대가 열리면 이방인이 중심 무대를 차지하게
되는 법 이라고 말했다.


[[[ 에릭 왓슨 : 뉴질랜드 ]]]

왓슨 제록스사 지사장으로 12년간 근무한 끝에 사무용품 종합 공급회사인
블루스타그룹 NZ사를 설립했다.

당시만 해도 사무용품 업계는 사무실용 가구 복사기와 컴퓨터 문방구
취급점 등으로 분할돼 있었으나 블루스타사는 이를 한꺼번에 취급해
사무용품 종합 공급업체로 출발했다.

블루스타사 창업시 왓슨은 10년내에 매출액 1억달러를 달성하겠다는
명확한 목표를 갖고 있었는데 올해 37세인 왓슨은 이미 그 목표를 달성했다.

지금은 금세기말까지 매출액 5억달러를 달성키로 목표를 수정했는데
그동안 이미 25개 군소업체를 인수하면서 사세를 계속 확장, 지금은
뉴질랜드에 50여개 지점을 가진 대형기업으로 성장시킴과 동시에 벌써
96년 매출액을 2억2,000만달러로 높여잡고 있다.

왓슨은 사회사업에도 열성을 보이고 있다.

한번은 뉴질랜드 라디오 방송국이 재정난때문에 인도에서 열리는 크리켓
빅 게임을 중계할 해설위원을 파견하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자진해 이를
후원, 좋은 평판을 얻기도 했다.

이후 블루스타사는 동 방송국의 적극적인 후원을 얻을 수 있었다.

왓슨은 아직도 블루스타사의 최대 주주이기는 하지만 1,600여 직원들에게
동사의 주식을 나눠주는 등 종업원 지주제를 적극 실시하고 있는데, 이는
회사의 성장 수익을 직원들과 함께 나눌 때에 기업의 성장세는 더욱 빨라질
수 있다는 지론 때문이다.


[[[ 로만 클루스카 : 폴란드 ]]]

85년 로만 클루스카는 국영 버스조립공장에서 재정책임자로 근무하던 중
메릿 시스템을 도입해 공장을 24개 소조직으로 나누고 근로자 개인의
생산성에 따라 보너스를 지급했다.

3개월 만에 수익이 2배로 늘었고 근로자들이 받는 봉급도 크게 올랐기
때문에 모두가 만족했으나 공산당 노조 간부들은 자본주의 방식도입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더구나 노조 간부의 월급이 상대적으로 적어지게 되자 이들은 클루스카를
해직시켰다.

클루스카는 딸기를 재배하면서 생계를 이어야 했다.

80년대 말 철의 장막이 걷히면서 그의 기업가 정신이 되살아나 12달러의
저금을 찾아 노위 삭츠 옵티머스SA라는 이름으로 컴퓨터회사를 설립했다.

그는 컴퓨터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지만 적어도 폴란드의 시장상황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고 있었고 양질의 컴퓨터를 저가로 공급하면 고객을
확보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국영 단체로부터 선불 주문을 받고 지역 은행에서 2만달러의 융자를 얻은
클루스카는 최고수준의 기술자와 젊은 근로자들을 모집했고 마이크로소프트
사와 계약을 맺고는 폴란드내 컴퓨터 공식 딜러계약을 체결했다.

극심한 경쟁이 계속됐지만 옵티머스사는 폴란드 컴퓨터 시장의 41%를
장악했고 지난해 1,200명의 근로자를 거느린 대공장으로 성공한 한편
1억3,500만달러의 매출실적을 올렸다.

94년 클루스카는 국영기업이 지배적인 폴란드 주식시장에서 사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기업을 상장했고 이를 통해 2,300만달러의 자본을 모을수 있었다.


[[[ 세포 세이나자칸가스 : 핀란드 ]]]

울루대학에서 전자공학을 가르치고 있는 세이나자칸가스교수(53)는 76년
심장박동 모니터를 발명해 운동선수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핀란드 유수 기업들에 심장박동기를 대량 생산, 보급할 의사가
있는지를 타진했으나 아무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세이나자칸가스는 폴라 일렉트로 OY사를 설립해 직접 보급에
나섰다.

그는 생산시설 확충을 위해 정부 보조금과 은행융자를 얻어내는 한편
고객층 확대를 위해 핀란드 올림픽 조직위원회를 설득하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고 결국 국내 판매망을 크게 넓히는 한편 80년대초에는
수출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세이나자칸가스의 심장 박동기는 생산량의 95%가 세계 40여개국에서
팔리고 있으며 연간 매출액은 1억2,500만달러에 달한다.

최대 시장인 미국시장에서만도 동사 제품의 마켓셰어는 80%로 생산량의
40%가 이곳에서 팔리고 있다.

학자들은 관공서나 국영기업체에서 일하는 것이 보편화 돼 있는 핀란드
에서는 사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세이나자칸가스를 이례적인 인물로 보고
있는데 핀란드 정부는 최근 실업률이 16%를 넘어서는 등 고용상황이 열악해
지자 세이나자칸가스와 같이 고용창출에 기여하는 기업가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나섰다.


[[[ 샤나즈 후세인 : 인도 ]]]

인도 뉴델리에만 630개 지점을 개설하고 세계 140여나라에 순식물성
화장품을 공급하고 있는 샤나즈 허발 살롱의 여성 경영자 샤나즈 후세인은
엄격한 회교 사회의 성차별 장벽을 뚫고 기업가로서의 꿈을 성취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후세인은 젊었을 때부터 화장품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남편의
잦은 장기 출장의 기회를 이용해 자신도 런던의 헬레나 루벤스타인 미용
대학에서 수학했다.

이때 후세인은 화학물질을 원료로한 화장품의 부작용이 대단히 크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됐고, 그 대안으로 인도인들이 오래전부터 간직해 온
자연과 식물의 미용및 치료효과를 이용해 식물성 화장품을 제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도 얻게 됐다.

뉴델리에 돌아온 후세인은 자기집 베란다를 개조해 최초의 미용실을
개설했는데 후세인의 아버지는 1,000달러의 사업 자금까지 내주며 "재미로
일하는 단계는 끝났다.

스스로 무언가 일구기 위해서는 신중하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며 딸의
사업을 장려했다.

후세인은 식물성 화장품 개발 연구에 열성을 쏟는 한편 35에이커의
농장에서 미용용품의 원료가 되는 식물을 직접 재배했다.

그녀는 또 화학약품및 합성물질로 만든 화장품의 부작용에 대한 학술회의를
개최했는데 언론이 학술회의 결과를 자세히 소개하는 바람에 유료 광고를
싣지않고도 제품에 대한 홍보효과를 누릴수 있었다.

현재 샤나즈 허발사는 인도내 6개 공장을 설립하고 4,200명의 직원을
고용해 화장품을 생산하고 있으며,인도 화장품 시장의 80%를 장악하는
한편 기업자산 1억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후세인은 해외에 비즈니스를 확장하는데 비상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세계 26개국에 지점을 개설한 열성도 대단하지만 한번 맺은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데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후세인은 특히 해외 지점과 거래할 때에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사업을
해야 하며, 상호신뢰를 쌓는 것이 금전관계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 산타크루즈.만자노 : 멕시코 ]]]

수십년동안 멕시코 종이 시장은 지역의 중소기업이 장악하고 있었다.

수입관세가 높아 외국 경쟁사들이 수입과 투자를 감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소비자들의 욕구는 무시됐고 제품의 질은 향상되지 못했다.

그러나 88년 카를로스 살리나스 대통령이 수입관세를 대폭 인하하자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각각 하버드와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산타크루즈와 만자노는
경제개혁의 소식을 전해 듣고 멕시코에도 사업의 기회가 열렸음을 직감했다.

이들은 멕시코 제지업계 시장의 10%만 차지해도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귀국한후 산타크루즈와 만자노는 멕시코시티에 그루포 포치테카사를
설립한후 일본의 오지 제지사와 스웨덴의 스토라 파피루스사와 계약을
맺고 멕시코내 독점 공급권을 따냈다.

포치테카사의 고객은 금방 1,200명으로 늘어났다.

산타크루즈와 만자노는 정석대로 기업을 운영했다.

이들은 주문 및 납기일을 정확히 지켰고 종업원들에게도 회사주식을
나누어 주었다.

또 이들은 공무원에게 뇌물 주기를 거부하는 한편 미련스러우리 만큼
꼬박꼬박 세금을 냈다.

멕시코의 경제구조는 여전히 취약했다.

금리는 치솟아 은행 융자얻기가 어려웠고, 지난해에는 페소화 가치절하로
수많은 기업이 도산했다.

그러나 포치테카사는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어려운 경제여건 속에서도
고객의 99%가 지불대금을 완납해 주었다.


[[[ 지미 라이 : 홍콩 ]]]

라이는 장물을 사다가 중국 암시장에 내다팔면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거리의 부랑배로 생을 끝내고 싶지 않았던 그는 12살때 짐을 꾸려
살던 곳을 떠났다.

그로부터 35년후 라이는 홍콩 굴지의 거물급 실업인으로 변모했다.

그는 2억달러 상당의 출판왕국을 건설하는 한편 3억5,000만달러 규모의
의류 전문백화점 체인 조다노 인터내셔널사를 일구었다.

홍콩에 도착한 라이는 한달에 10달러를 받고 섬유공장에서 일하면서 쉬는
시간마다 영어를 공부했다.

얼마되지 않는 돈이나마 저금이 모이면 영어 사전과 국민학교 영어
교과서를 사서 공부했고 일부러 큰소리로 책을 읽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발음을 고쳐주기를 요청했다.

라이는 이때부터 자신의 결점을 드러낼수록 다른 사람의 비판을 통해
바로잡기가 쉽다는 점을 배웠다고 말했다.

20세 되던해 그는 공장 매니저로 승진했지만 명령을 받는 대신 자기 일을
하고 싶었다.

75년 우연찮게 증권시장에 3,000달러를 투자해 75만달러를 벌어들인 라이는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81년 이를 기초자금으로 이용해 의류
공급회사를 설립했다.

주로 세계 유수 의류 전문 백화점의 영업 특성을 배워가면서 회사를 키워
나간 끝에 라이는 아시아 전역에 300여개의 매장을 가진 대형의류백화점망을
구축했다.

89년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가 발생하면서 라이는 언론사업에 뛰어들었는데
이는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수많은 학생들과 민주인사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학살당하는 모습에 분개했던 까닭이다.

그는 잡지 넥스트와 애플을 창간했는데 독자수는 순식간에 30만명에
이르렀다.

라이는 홍콩이 중국에 이양되는 97년이면 자신도 홍콩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하면서도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낙심하지 않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 우지아 갈릴 : 이스라엘 ]]]

이스라엘은 건국 당시부터 농업을 중심으로한 내수 위주의 산업정책을
펼쳐 온데다 산업보다 학문을 우선시 해온 전통 때문에 산학 연계가 약한
것이 특징이었다.

80년대까지도 이스라엘에는 하이테크 비즈니스가 성행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이때문이었다.

그러나 갈릴은 이같은 연결고리가 약한 하이테크와 비즈니스를 연관시켜
12억달러규모의 기업을 일구어냈다.

갈릴은 50년대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대학과 연구소 기업간의 원활한 정보
교류및 협력관행에 탄복했다.

이스라엘에서는 학계가 산업계와 연관을 갖게 되면 마치 타락하는 듯한
인식을 주게됐기 때문이다.

갈릴은 54년 이스라엘로 귀국해 이스라엘의 MIT라고 불리는 테크니온대학의
교수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전통적인 학자에 머무르기 보다 학교내의 엄청난 과학지식과
기술을 사업에 응용하는 방안을 강구했다.

마침내 62년에는 16만달러를 가지고 하이파와 엘론 전자산업사를 설립
했는데 처음 엘론사는 의료기기에서 방사능 검출 측정기인 가이거모니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엘론사는 급속히 성장하기는 했으나 사업의 초점이 뚜렷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갈릴은 수익성이 뛰어난 사업부문을 개별 기업으로 독립시키면서
사업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개별적인 발전계획을 수립해 나갔다.

이같은 차별화정책 덕분에 의료기기 전문 생산업체로 독립된 엘싱트사는
이스라엘 하이테크 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의 나스닥(NASDAQ)주식시장에
상장할수 있었고 그밖에도 엘론사는 20여개의 독립기업을 거느린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여전히 테크니온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갈릴은 자신의 역할을 십자군의
역할과 비슷하다고 자처하고 있다.

그동안 이스라엘에서 도외시되던 산학 협동의 길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있을뿐 아니라 대학에서 우수한 기업가를 발굴해 업계로 내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노력 덕분에 이스라엘정부도 비즈니스 지원에 적극성을 띠게 됐고
지금은 기업가의 연구개발 지원예산을 연간 4억달러씩 수립해 놓고 있다.


[[[ 리처드 마포냐 : 남아프리카공화국 ]]]

리처드 마포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유일한 흑인 재계 거물이다.

그는 흑인 밀집지역인 소웨토(Soweto)에서 소매업과 고급차 판매업및
주류업계를 장악하고 있으며 종마 사육업에도 손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셀룰러폰 전화사 아프리링크의 대주주이며 요하네스버그
주식시장에서 활동하는 증권회사 킬리만자로 투자사의 회장직도 맡고 있다.

올해 69세인 마포냐는 앞으로 소웨토지역에 대단위 쇼핑센터를 건립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남아공 북동부의 소농 출신인 마포냐는 소웨토지역에서 의류 행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아파르트 헤이트법에서는 흑인의 점포개설을 금지했기 때문에 마포냐는
행상 이외의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흑인이 축산농장을 할수 없다는 규정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낸
마포냐는 아내와 함께 젖소를 키우면서 자전거 배달부대를 이용해 아침
일찍 가정에 우유배달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소웨토주민중 대다수는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에 이 사업은 번창했다.

그후 마포냐는 백인당국으로부터 사업허가를 얻기 위해 젊은 흑인 변호사를
고용했는데 그가 바로 넬슨 만델라였다.

이후 두사람은 평생 친구관계를 유지했다.

90년 만델라가 27년만에 감옥에서 석방됐을때 마포냐는 자신의 BMW승용차로
만델라를 맞았고 만델라는 첫 자유의 밤을 마포냐의 집에서 보냈다.

60년대와 70년대 마포냐는 정육점과 주유소등의 사업을 계속했는데 이를
두고 일부 흑인들은 마포냐가 백인정권의 비호아래 특혜를 입었다고 비난
하기도 했다.

아프리카 국민의회(ANC)의 다국적 기업축출 주장을 내세웠을 때에도
마포냐는 이에 반대해 이같은 비난은 증폭됐었다.

그러나 마포냐는 특혜를 받은 적이 전혀 없으며 항상 당국과 정면승부해
왔다고 주장했다.


[[[ 벤슨 타케이 : 필리핀 ]]]

필리핀 세부시티에 거주하는 다케이는 친구가 코코넛을 팔아서 많은 돈을
버는 것을 보고 자신도 해초를 팔면 돈을 벌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몇몇 무역상에 샘플을 보내 1,400달러 상당의 주문을 따낼수
있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14세였다.

화장품및 식품회사로부터 더 많은 주문을 받게 되자 다케이는 직원을
고용해 해초를 채취해 말려 파는 버그사(Shemberg Corp.)를 설립했다.

다케이가 채 20살이 되기도 전에 버그사는 100만달러 규모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때 쯤 해초를 단순히 채취하는 데에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다케이는 연구진과의 협력을 통해 수차례의 실험 결과 해초를 재배할수
있는 방법을 개발해 냈고 이 방법을 통해 약 50만명의 농부들과 개별계약을
맺고 해초를 공급받기 시작했다.

지금 버그사는 필리핀 해초업계 3위 기업으로 떠올랐고 지난해 세계시장
매출액이 4,000만달러에 달했다.

창업 초기 다케이는 절대적으로 로테크에 의존했다.

해초를 수집해 이를 잘 말린다음 포장해서 발송하는 것이 하는 일의
전부였다.

그러나 프랑스에 소재 한 해초 가공공장을 견학한뒤 그의 생각이 바뀌었다.

귀국한 다케이는 직접 해초를 가공하기 위한 공장을 설립해 완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필리핀내 3개공장에 1,500명을 고용하는 대공장
으로 성장했다.

다케이는 사업이 궤도에 오른 뒤에도 마르코스 정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올해 41세인 다케이는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 많은 것이 변했으며
지금은 회사를 빼앗길 염려없이 발뻗고 잘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 모리치오 드 수자 : 브라질 ]]]

수자는 60년대 상파울루에서 범죄문제 담당 기자로 자신의 경력을
시작했다.

사진이 귀했던 당시 수자는 기사에 사진 대신 만화를 그려 놓고는 했는데
이것이 편집장의 눈에 띄어 신문 만화가로 자리잡았다.

64년 쿠데타 세력으로부터 불순분자로 몰려 신문사에서 쫓겨난 수자는
모리치오 드 수자 프로덕션(Mauricio de Sousa Productions:MSP)을 설립해
독립 만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수자는 브라질의 만성적인 초인플레와 군사독재의 횡포를 뚫고
오늘의 브라질판 디즈니 왕국을 유지하고 발전시켜왔다.

그러던 중 90년 최대 시련이 닥쳤다.

당시 페르난도 칼러 드 멜러 대통령이 1,000달러 이상의 모든 예금을
동결했기 때문에 수자는 직원들에게 봉급조차 줄 수가 없었다.

수자는 모든것을 포기하고 외국으로 나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지만 그동안 고락을 같이했던 직원들과 매달 만화 잡지를 구독해 준
수백만명의 독자들을 저버릴 수가 없어 버티기로 결심했다.

그의 인내는 결실을 맺어 지금은 브라질의 인플레가 줄어들면서 새로운
투자시장이 열리기 시작했고 동결됐던 그의 예금도 되돌아 왔다.

오늘날 수자의 회사는 200여명 이상의 만화 주인공이 등장하는 11개 잡지를
출판, 만화영화 제작 디즈니랜드와 유사한 대규모 놀이공원을 건설, 3,500개
이상의 상품에 만화 주인공 사용 허가권을 판매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큰
수입을 올리고 있다.

그중 수자 만화왕국의 대표적 만화 주인공인 모니카와 관련된 상품
매출액만도 연간 7억달러에 달한다.

수자는 월트 디즈니가 미국에서 이룬 거의 모든것을 브라질에서 성취했다.

다만 한가지 목표가 더 있다면 이제 미국시장을 공략하는 일이 남았을
뿐이다.

그런데 최근 수자가 20세기 폭스사와 협의를 시작, 그의 마지막 목표가
달성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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