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자 < 전문직 여성클럽 한국연맹 회장 >

동창생 자녀의 결혼식이 올들어 세번째.

지난 일요일, 신부아버지의 친구로 결혼식에 참석했다.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인 대학교수의 주례, 양가 부모의 씩씩한 입장,
신랑신부의 동시입장, 활달한 신부의 걸음걸음에 내빈을 살피고 목례하는
자연스러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번지는 실내, 결혼예물 교환순서를 잊은
것도 일생의 즐거운 추억거리라고 말하는 긍정적 가족...

좋은 결혼식이었다.

식이 끝난후 동창생 5명이 찻집에 들렀다.

아이들얘기, 생활얘기중에 요즘 50대후반 남편들이 아내들 눈치본다는
얘기가 나왔다.

부인이 일찍 귀가하는 것을 귀찮아 하기 때문에 집에 일찍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씁쓸한 표정이 남자들의 얼굴에 잠시 지나갔다.

회사사장인 한 친구는 심각해졌다.

"야, 나는 오늘 정말 너무 큰 충격을 받았어.

그렇게 눈치를 보고 산단 말이야"

기절초풍한 얼굴이다.

대화가 이어진뒤 그 현상의 원인은 남편이 집안에서 조력자도 못되고
자기가 할일까지 아내에게 시키는 짐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났다.

솔직이 여성은 세월이 갈수록 할일이 갈수록 많아지고 영역이 넓어진다.

자립적이고 현명해지고 기능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가정안팎의 대소사를 관장하다보니 행정기관 상대하는 것부터 집안구석
수리하는 것까지 다 습득한다.

불평등한 생활속에서 마침내 생활에 필요한 모든 과목의 기능인이 되고
가정의 전문관리인이 된다.

반면에 남성은 활동적이며 자립적이었던 젊은 날을 지나, 직위가 올라
가면서 모든 일을 부하직원 비서 후배 아내에게 의존하는 불완전한
생활인으로 변해버린다.

돈버는데 필요한 머리와 입만 강화되고 손발의 기능은 퇴보한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퇴직이라는 이름으로 경제활동 자체가 제약을 받기
때문에 결국은 머리 입 손발이 다 퇴보하는 것이다.

TV화면에 사우나탕에 앉은 여인들이 남편흉을 보는 대목이 나왔다.

"신문 가져와라, 물 먹고싶다, 손수건 가져와라"하고 시키는데 대해
불만을 털어놓는 것다.

다음은 그들이 말하는 남편들의 요구이다.

<>재털이 가져오기 <>신문 가져오기 <>물 가져오기 <>속옷꺼내기
<>물 끓이기 <>청소 <>세탁 <>설거지 <>커피끓이기 <>밥하기 <>국끓이기.

이중 뒤로 갈수록 남자혼자 못하거나 어색하지만 앞의 것은 남자 혼자
할수 있는 일이다.

남편이 짐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은 혼자 할수있는 일을 아내에게 명령하기
때문이다.

아내가 사랑하는 남편에게 얼마든지 기꺼이 하고싶은 일도 많다.

아내가 없으면 안되는 일은 아내에게도 자긍심을 준다.

그리고 그런일을 전문가인 아내에게 의존하는 것은 무리없어 보인다.

그러나 무감각하게 아무일이나 명령하는 것이 자신을 무능력의 세계로
한발씩 후진시키고 귀찮은 존재로 만들고있다는 것을 남편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신은 손이 없소, 발이 없소" 하는 핀잔을 받을 일거리는 사전에 점검해
자기가 처리하고 "당신은 그것을 할줄 모르니까"하고 생각할수 있는 일만
아내에게 위임하는 것이 현명하다.

할줄 모른다는 것은 답답한 경우가 많다.

취미가 아니고 그것이 생활필수일 때는 말할 것도 없다.

보다 잘 살기 위해 생활기술을 남성들도 익혀야 한다.

자격증시대라고 한다.

집밖에서 자격증을 따는 일보다 가정에서 먼저 가사전반에 걸친 기술을
익혀 가사자격증을 가질 필요가 있다.

가족간에도 보완적인 관계가 아니면 필요한 존재가 되지못한다.

아기를 낳는 것은 아내가, 아기를 돌보는 것은 남편도, 아기에게 젖을
주는 것은 아내가, 우유를 먹이는 것은 남편도 하는 것이다.

가족행복의 근간인 경제적 공헌자가 귀찮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융통성있는 역할수행에 근거한 평등한 부부관계를 만드는 일을 골똘히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가족은 경제공동체이기 이전에 정서공동체임을 생각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수 있을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