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영감님의 이랑이 되는 것이 싫어서 이러는 것은 아니겠지?

너도생각해 봐.

계속 시녀로 있다가 몇년 지나 대부인 마님이 너를 하인 하나와
맺어주면 넌 평생 종 신세를 면하지 못할 거 아니냐?

네가 낳게 될 자식들도 그렇고.

그러니 이번에 내 말을 잘 들어 아랫것들로부터 아씨 소리를 듣는
자리로 올라오란 말이야.

영감님도 너를 아낄 거고, 나도 마음이 좁은 사람이 아니니 너를 잘
돌보아줄 것이고.

게다가 아들 딸들을 턱 낳아 봐, 넌 나하고도 어깨를 견주는 이랑이
된단 말이야.

세상에 이런 횡재가 어디 있느냐 말이야.

이번 기회 놓치고 두고두고 후회해 보았자 소용 없지"

형부인이 은근히 협박조로 나왔다.

하지만 원앙은 한숨을 한 번 내쉬었을 뿐 여전히 별 반응이 없었다.

"아이구, 답답해.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양단간에 한마디
대답이라도 해봐"

그제야 원앙이 겨우 한마디 대답을 했다.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니잖아요"

원앙은 완곡하게 거절의 표시를 한 것이지만, 형부인은 어찌해서든지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려고 하였다.

"알겠다.

부모가 있는 몸이니 부모에게 먼저 물어보란 말이지?

하긴 이 일도 혼사라고 할 수 있으니 부모의 의견을 최우선으로
들어보아야지.

내가 네 부모에게 물어볼 테니, 너도 부모가 네 뜻을 묻거든 나에게
처럼 우물쭈물하지 말고 분명히 대답하도록 하여라"

형부인은 이제 더 이상 원앙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지겨운지 벌떡 일어나
원앙의 방을 나가버렸다.

원앙은 형부인에게 인사를 올린 후 길게 한숨을 쉬면서 주저앉았다.

두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원앙은 녕국부나 영국부에서 대감의 첩들이 어떤 대우를 받으며
생활하고 있는지 익히 보아온 터였다.

물론 시녀나 하인들을 거느리고 어느 면에서는 떵떵거리며 살고
있지만, 첩이라는 신분 때문에 가문에서 멸시를 받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였다.

보옥의 아버지 가정의 첩 조이랑이 정실부인인 왕부인이나 보옥의
할머니 대부인에게서 얼마나 멸시를 받고 사는가 말이다.

조이랑의 아들 가환은 정실부인의 아들인 보옥에게 늘 구박을 당하고.

형부인이 지금은 원앙이 가사의 첩으로 들어오면 잘 돌보아 주겠다고
말을 하고 있지만, 막상 원앙이 첩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를
일이었다.

돈 한푼 지출하는 데도 벌벌 떨며 인색하기 그지없기로 소문이 나
있는 형부인이 아닌가.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