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가 언젠가는 죽는다.

이 점에 관한 한 예외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태반의 사람은 자기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만은
쉽게 인정하려고 들지를 않는다.

그야 물론 자기도 예외없이 죽는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는 있지만, 그
순간을 상상하지는 못한다.

왜?

두렵고 무서운 것이다.

우선 끔찍스러운 생각부터 든다.

그리하여 누구나 눈깜짝할 사이에 죽어버리는 순간적인 죽음을 원하다.

아니면, 그냥 자다가 그대로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 그런 죽음.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는 그의 저서 <수상록> 속에서 특히 "죽음"의
문제를 끈질기게 다루고 있는데, 그는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왜 위대한가.

확실하게 다가오는 죽음에 맞서 추호나마 흐트러짐이 없이 의연하게 참아
냈다는 것이라고.

사형 선고를 받고 30일간 그는 얼굴색하나 바꾸지 않고 죽음과 맞서 "죽는
순간의 상상"을 이겨냈던 것이다.

하지만 몽테뉴는 미처 죽음이라는 걸 상상할 틈조차 없이 눈깜짝할 사이에
죽어버리는 그런 죽음을 원했다.

"나는 내가 열심히 배추를 심고 있는 중에 죽기를 원한다"라고 그는 쓰고
있다.

그러나 그게 엿장수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이렇게 다짐을 한다.

"우리들은 되도록이면 하시라도 떠날 수 있도록 신을 신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그러나 그건 제대로 사람 사는 길일 수가 없다.

늘 죽을 준비를 하고 이승을 하직할때 신을 구두까지 미리 신고 있는 삶이
어찌 제대로 활달하게 사는 길일 것인가.

그건 제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그야말로 반죽음이요, 반삶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쩌면 좋은가.

결국 몽테뉴는 자연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들이 이 세상에 들어왔을 때처럼 이 세상을 나가라"고.

그러나 이 소리도 그런대로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죽음의 문제를
속시원히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한 마디로 말해 성에 안 찬다.

그 말 뜻이 이해는 되지만 여전히 두렵고 끔찍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작금에 와서 그런 증상이 없어졌지만, 40~50대적 한때 필자는 자다가
비몽사몽 간에, 언젠가는 내가 이 세상에서 깨끗이 없어진다, 지금 이렇게
멀쩡한 내가 도대체 그렇게 될 수가 있는 건가 싶어 심한 공포에 떨다가,
저엉 견디기 힘들면 벌떡 일어나 서서 머리를 서너번 가로 흔들며 방안을
두어바퀴 걷거나, 벌컥벌컥 소리를 내며 냉수라도 한 사발 들이켜면 어느새
그런 공포에서 놓여나 말짱한 자기로 되돌아오곤 하던 것이었다.

이런 경우의 말짱한 자기란, 그냥 당장의 삶의 한가운데, 삶의 현장으로
되돌아오며 "죽음"이라는 시커먼 덩어리는 멀리 멀리 달아나버리던
것이었다.

그렇게 안도의 큰 숨을 내쉬며 다시 잠자리에 들곤 하였었다.

최근에 필자는 백농 김진흥선생의, 먼저 저승으로 떠나보낸 아내(향정
한무숙)를 그리며 써낸 <못다한 약속>이라는 책을 읽으며 80노경과 죽음
이라는 문제를, 세계문학 통틀어 어느 책에서도 맛볼 수 없는 극명하고도
생생한 현장감으로 들여다볼 수가 있었다.

그 중의 한 대목을 인용해 보면, "매일 매일 나의 생활은 이리 갈까 저리
갈까 갈팡질팡한다.

눈을 감고 누워 이것 저것 생각하다가 공연히 목이 말라 물을 마셔보았다가,
과자를 먹고 TV를 틀어보았다가, 그것도 싫증이 나면 끄고 잠을 자기도
한다.

낮잠을 자면 머리가 아프다.

그러면 냉수와 커피를 마셔보기도 한다.

의자에 앉았다가 땅바닥에 앉아 신문을 읽어 보기도 하고, 어두운 눈으로
이 책 저 책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벽장을 뒤적거리다가는 안경을 벗고 우두커니 천장을
보며 누워 버린다"

어떤가.

필자는 이날 이때까지 이 이상 적나라하고 극명하게 토로된 80노경의
실체를 그려낸 글을 달리 읽은 일이 없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