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후 한참이 지나도록 시골 부자라 하면 태반이 정미소 아니면 양조장
이었다.

그들에겐 금시계줄 늘인채 초등학교 졸업식에 초청되는 지방유지 행세가
알파였다.

30여년 고생끝에 아시아의 부자 소리를 듣게된 한국.

어느새 동양유지론 성이 안차 구미 사교클럽(OECD)가입에 이만저만 바람이
든게 아니다.

하긴 정미소도 정미소 나름이었다.

대농을 겸하면 알부자로되, 농사 싫어 땅팔아 차린 정미소는 가산 날리기
안성맞춤이었다.

몇마력 발동기 돌리며 거들먹거리던 동네 방앗간은 정미소의 아류여서
거덜나기 더욱 십상이었다.

방앗간집이 빠지는 함정은 간단하다.

자기집이 부자라는 식구들의 착각이다.

왜냐.

뭣보다 크게 지어놓은 곳간이 가을걷이 한두달만은 볏가마로 가득 찼다.

문제는 거기서 오는 혼돈이다.

벼는 쌀로 찧는 즉시 주인에게 실려나가고 남는건 방아 삯 몇 톨이다.

삯받이 주제를 항시 잊고 쌓인 남의 곡식을 무의식중 제것으로 안다.

어른 아이 같다.

그 착각에 따르는 화는 식구들의 주전부리 낭비벽이고 그중 망조는 남정네
의 노름벽이었다.

추수부터 봄까지 겨우내 방앗간집 사랑은 골패 마작으로 밤을 팬다.

알량한 재산은 붇기는 커녕 봄볕에 고드름 녹듯 마냥 줄다가 어느날
드디어 방앗간의 주인이 바뀐다.

박정희장군이 5.16을 치르고 눌러앉으며 내건 깃발이 수출입국이었다.

영국을 모방했건, 창안을 했건, 청사에 기록될 잘된 선택이었다는데
반론은 없다.

천연자원도 자본축적도 없는 빈국이 원료를 들여다 가공 수출, 가득액으로
먹고 살며 발전도 하자는 국책이다.

하지만 원리로 보면 영락없는 방앗간이다.

농사지을 논밭뙈기는 모자라고 그렇다고 장사밑천 모아논 것도 없는 털털이
빈농에게 차례올 생업은 품팔이다.

방앗간은 그중 윗길이다.

수출입국은 듣기 좋게 문자를 쓴 완곡한 표현이라고 해야 솔직하다.

그런 조신한 생각을 언제건 떨쳐버리지 말아야만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곳간에 들어찬 추수벼가 잠시 방아찧으러 맡겨온 남의 물건이라는 사실을
망각치 않는다.

주전부리와 노름으로 가산을 들어먹는 비운을 피할수 있다.

방앗간에 쌓인 동네집 볏가마는 수출이 본업인 나라처지에 빗대면 무엇
인가.

한마디로 이 나라가 몽매간 자랑하는 엄청난 무역고다.

외화표시로 2천하고도 수백억달러에 달하며 물량으론 항구가 터져라 선적
되어 드나드는 산같은 화물이다.

방앗간집 재산이 쌓인 볏가마의 전부가 아니라 극히 일부의 방아 삯뿐이듯,
그 큰 무역액이나 실물의 전체가 나라의 재산이 아니고 단지 가득액(수출액
마이너스 수입액)이 가용자원인 것이다.

따지면 조야에 이 평범한 진리를 모를 천치는 없다.

그러나 역시 사람이란 아둔해서 평소엔 잊고 착각하고 산다.

방앗간 식구들의 낭비벽과 너무 흡사히 과분한 사고방식-생활방식에 허덕
이는 주체들이 다름아닌 오늘날 한국의 국민이고, 특히 고관이다.

87~90년 단 수년 빼고는 수입초과로 만성 무역적자였고 무역외수지 또한
그래왔다.

그래도 몇년전까진 적자에 겁이라도 냈으니 흑자전환 희망이라도 있었다.

요즘와선 별별 논리로 웬만한 적자쯤 문제 아니라고 큰소리 치니 장래성
마저 얇다.

논자들은 개방시대엔 외자의 유입이 넘치므로 자본수지가 흑자라는 데서
여유를 찾는다.

또 요즘 정부는 수출회복책으로 원화평가를 낮추기 위해 부동산투자등
외화의 해외유출 촉진책을 방책이라고 내놓았다.

간도 크다.

아무리 외화가 몰려들어도 그건 결국 언제건 빠져 나가거나 최소한은
갚아야할 부채임에 틀림없다.

결국 선진국에 억지로 끼이려는 욕심에 힘에 겨운 자유화조치를 울며
겨자먹기로 하는 중이다.

요컨대 수출입국의 기치를 걷어내리곤 지탱하기 힘든 경제체질에서 왕도는
누가 뭐라 해도 무역과 무역외의 흑자를 내는 일이다.

일본이 5년간의 거품해체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끄떡없이 버티는 힘은 수출
을 바탕으로 누적해온 국제수지흑자 외화자산이다.

우리는 어떤가.

몇년째 큰소리완 달리 적자폭은 커져만 왔고 올해 사정은 더 나쁘다.

그래도 아랑곳 없이 정치는 겉 멋에 죽고 겉 멋에 사니 문제다.

사방을 둘러봐도 안팎으로 표따는것이 지상과제고, 하루라도 뽐내지 않고는
직성이 안풀리며, 그러면서도 청사에 남으려는 한국정치의 괴성에 근본책임
의 태반이 돌아갈 밖엔 없어 보인다.

멀리 남미 ABC 3국의 영광은 이미 역사속에 묻혔다.

한국의 성장에 외국인들이 경악한 일도 과거사로 돌아가려 한다.

짐작도 못하던 일들이 마냥 벌어진다.

스위스IMD의 96년 국가경쟁력 평가에서 지난해 34위이던 중국이 올해
26위로 뛴 반면 한국은 24위에서 27위로 강등했다.

우리들, 특히 자칭 지도자군은 이 나라가 채 성숙기에 들기도 전에 시들지
않도록 하려면 OECD 가입등 겉모양에 매달리기 보다 방앗간의 운명을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여 근면과 절약을 체질화해야 한다.

그래야 장래가 있다.

1차 5개년 계획부터 지켜보며 불변한 믿음을 81년 국제경제학회 춘천토론
이후 다시 되뇐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