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신재벌정책이 다시 수면위로 부상하고 있다.

평소에는 잠복하고 있다가 때가 되면 연기와 용암을 분출하는 휴화산처럼
우리 나라의 재벌은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주요 경제정책이 바뀔 때마다
빠짐없이 논쟁의 소용돌이 속에 던져지고 있다.

재벌이 세간의 주목을 받는 것은 무엇보다도 재벌이 행사하는 엄청난
영향력 때문이다.

수출과 투자를 통하여 우리 경제 전체의 경기를 좌우하고, 하도급거래를
통하여 중소기업의 사활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강력한 로비력으로 정계및
행정부의 정책결정에도 관여한다.

뿐만 아니라 기업문화라는 용어로써 포용되는 재벌기업의 의식과 관행,
제도는 우리 사회의 가치규범과 행동양식까지도 변화시키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대기업정책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어려운 이유는 효율과 형평간의 조화라고
하는 경제학의 영원한 숙제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장기적으로 보면 효율과 형평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반드시 잡아야
하는 두마리 토끼이다.

효율을 통하여 얻어지는 물적 풍요가 없는 형평이 한낱 헛된 구호에
불과하다는 것은 사회주의 경제의 몰락으로 이미 증명되었고, 형평을 통한
사회계층간의 통합과 체제정당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효율의 기반이
와해되고 만다.

우리는 스위스의 IMD(국제경영개발원)가 적성하는 국가경쟁력보고서를
빈번히 인용하면서도 이 보고서가 국가경쟁력의 양대 축으로서 효율과
사회적 통합을 꼽고 있다는 점은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특정한 시대적 상황에서는 효율이 중시되기도 하고 형평이
우선되기도 한다.

우리는 지난 30여년간의 압축성장기간동안에 효율을 주로 하고 형평을
종으로 삼았다.

물론 80년대 후반에는 한동안 형평 우선의 분위기가 지배하기도 했으나,
국가경쟁력위기론 및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효율과 생산성이 다시 주된
위치로 복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치민주화의 진전은 경제민주화에 대한 사회적 욕구를 증대시키기
때문에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효율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다 보면 효율이
오히려 떨어질 우려가 크다.

양의 경쟁에서는 일사불란한 의사결정과 투자재원의 최대동원이 요체였으나
질의 경쟁시대에는 조직구성원의 능동적인 참여와 창의를 통한 혁신만이
경쟁우위를 창출해 내며, 기업도 소비자와 이해당사자들로부터 광범위한
수용과 지지를 얻지 못하면 번영을 계속하기 어렵게 된다.

세계화와 경제민주화를 조화시키는 재벌정책의 방향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우선 재벌의 직접적인 활동무대를 경제부문에 국한시키고 정치, 사회,
문화, 학문, 예술 등의 비경제부문에 있어서는 간접적 후원자로서의 역할에
그치도록 해야 한다.

물론 정보.통신기술혁명과 사회 모든 분야의 상업화추세에 따라서 경제.
비경제부문간의 장벽이 무너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정된 자원으로 우선 전통적인 경제부문의 세게일류화를
이룩하는 것이 급선무다.

이는 또한 재벌의 무소불위의 영향력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을 해소하는
길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경제활동부문에서는 철저한 시장원리를 도입하여 경쟁과 견제를
동시에 제도화해야 한다.

과잉투자론에 근거한 진입규제, 제조업공동화를 우려한 해외투자 규제,
소유와 경영의 인위적 분리와 선단식 경영체제의 인위적 해체 등을 지양하고
오직 시장경쟁을 통하여 경영전략과 경영체재의 우열이 판가름나도록 한다.

이를 위하여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경쟁 제한적이고 공정하지 않은제도와
관행을 파괴하는 것이지만, 정부 자신이 우선 공정한 규칙을 엄격하게
적용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편파적이고 일관성 없는 판정을 일삼는 심판은 오직경기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데 기여할 뿐이라는 점이 상기될 필요성이 있다.

경제력 집중은 경제민주화를 위하여 억제되어야 하겠지만, 세계화시대에는
접근방법이 달라져야 한다.

여신관리 또는 출자총액규제 등의 직접적인 행동규제를 지양하고,경쟁적
이고 투명한 경영을 통하여 시장내에서 기업의 최적행동이 유도되도록 한다.

연결재무제표등 기업공시제도의 신뢰성 재고, 회계감사의 중립성 보장,
소액주주의 권리보호는 반드시 강화되어야 한다.

경제력 집중의 해결은 우선 기업과 소유주로서의 개인을 부분하여 기업의
경제력 집중은 시장경쟁과 경영투명성의 제도적 확립을 통하여 적절히
억제되도록 하되, 개인의 경제력 집중은 국가의 고유기능인 징세권에 의해서
완화되도록 한다.

재벌에 대한 여신관리를 폐지하는 대신에 조세관리를 도입할 필요성이
있다 하겠다.

그룹회장 또는 그룹기획실 등은 차제예 법령에 명문화하여 권한과 책임을
동시에 갖도록 하는 방안이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채무보증은 동일인지배의 그룹경영체제와 금융기관의 안일한 대츨관행이
맞물려서 생기는 현상이기 대문에 이를 직접적으로 금지시키는 것보다는
경영투명성 제고와 금융기관의 경쟁도입을 통하여 억제되도록 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대출규모가 클수록 파산의 실현가능성이 작다는 경험적 믿음이 깨어지면
채무보증에 의존하는 대규모 대출은 오히려 기업과 금융기간 쌍방의 위험을
더욱 증대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재벌기업은 철저하게 이윤창출에 전념할 때 그사회적 기여가 극대화된다.

예를 들어 중소기업 지원을 윤리적 차원에서 요구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사회적 약자로서의 중소기업 보호는 정부의 몫이 되어야 한다.

정부, 관련단체, 심지어는 학회까지도 준조세의 성격을 갖는 기부금을
강요하여 재정부족을 해결하려는 관행이 불식될 때 재벌에 대한 올바른
시각과 정책이 정립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23일자).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