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위대하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산부인과 의사인
필자로서는 자신있게 그렇다고 대답할수 있다.

새 생명을 얻기 위해 때로는 자기생명까지 포기해야할 위험을 감수하는
경우를 종종 보기 때문이다.

얼마전에도 이런 경우를 봤다.

환자는 27세.산모는 아기를 낳기 위해 필자에게 진찰을 받았다.

두번째 임신이지만 첫아기를 사산했기 때문에 이번에 얻게될 아기가
첫아기인 셈이었다.

힘겹게 낳은 아기가 태어나자 마자 심한 호흡곤란으로 숨을 거뒀다는
것이다.

전에 다른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으나 아기를 잃어서인지 그곳에 다시
가기 싫어 병원을 바꿨다고 했다.

이번에는 건강하게 낳아야 한다는 간절함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산전관리를 열심히 받았다.

간절한 기도속에 아기는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랐고 마음졸이던 10개월이
지나 어느덧 분만 예정일이 다가왔다.

수술날짜를 결정해 분만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예정일을 며칠 앞둔 어느날 밤 갑자기 진통이 시작돼 병원으로
왔다.

진찰결과 자궁문이 거의 다 열려 있었다.

그러나 정상분만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곧 응급수술에 들어갔다.

다행히 아기는 건강했다.

4.0kg의 여아였다.

그러나 문제는 분만후에 생겼다.

절개부위는 다 봉합했으나 자궁이 수축하지 않아 출혈이 계속되는
바람에 수술을 끝내지 못하고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온갖 종류의 자궁수축제를 투여하고 마사지를 하면서 자궁이 수축돼
출혈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수축되는 듯하다가 다시 이완되고 또 그러기를 1시간이상 계속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처치를 다한 뒤에도 환자의 혈압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혹시나"하고 우려했던 일이 생긴 것이다.

자궁만 들어낸다면 곧 출혈이 멈출 테지만 그렇게 되면 이 환자는
다시는 아기를 가질수 없게 될것이다.

쉽게 결정을 내릴수 없었다.

의료진의 피를 말리는 시간이 계속됐다.

몇명의 의사가 좀더 적극적인 처치를 하기로 결정하고 수혈을 시작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가혹했다.

계속되는 처치에도 불구하고 산모의 상태가 나빠지는 바람에 자궁제거
수술을 더이상 늦출수 없었다.

2시간여 계속된 고민에 종지부를 찍고 수술을 시작했다.

임신됐던 자궁에는 혈관이 왕성하게 발달해있기 때문에 제왕절개이후
시행되는 자궁제거수술은 출혈이 많아 어려울수밖에 없다.

기다렸다가 다시 결정하고 시술하는 어려운 작업은 분만후 거의
4시간만에 끝났다.

회복실에 옮겨진 그녀는 자신이 오랫동안 삶의 문턱에서 사투를
벌였다는 사실을 모르는채 마취에서 깨자마자 고맙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길게만 느껴졌던 그날 새벽의 고단함이 산모의 건강한 웃음으로
다 씻겨나갔다.

남편은 다시 태어난 아내의 손을 꼭 잡은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신생아실에 올라가보니 아기가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잠자는 아기얼굴 위로 퉁퉁 부어오른 아기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여성의 모습이었다.

과학기술 발달로 인해 출산에 따른 위험은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

심장질환이나 조산으로 인한 사산등 출산사고는 전체 출산의 1%미만이다.

하지만 아직도 출산은 여성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칠수 있는 힘든
일이다.

거의 매일 산모를 만나고 출산을 돕지만 그때마다 긴장하고 생명의
신비에 경탄하게 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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