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 서둔동!

호반에 세워진 10층 건물이 유난히도 우람해 뵈는 것은 이곳에 서린
높은 이상 때문일까, 아니면 드넓은 호수의 잔잔함 때문일까.

70년대 초반 새마을운동이 일어나면서부터 우리는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아침운동, 주간학과, 저녁 분임토의로 이어지는
고달픈 일과가 새벽 2시가 넘어서야 끝나고 조립식 2층 침대가 즐비하게
늘어선 침실에서 삐걱거리는 침대소리, 코고는 소리로 새우잠 마저 설치던
교수생활....

한달에 한번 퇴근하는 휴식만으로는 쌓인 피로를 풀지 못해 관절염과
디스크 환자가 속출해도 우린 국민정신을 주도한다는 일념으로 사명감을
불태웠으며 살갗이 맞닿는 생활에서 정은 깊어만 갔다.

세월은 흘렀다.

이상에 미쳤다기(광)보다 미치기(급)를 바랐던 많은 동지들이 고달픔을
견디지 못해 건강상의 이유로 하나 둘 떠나갔으며 일부 교수들은 정권이
바뀌는 와중에서 새마을운동이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국민에게
사과하는 뜻으로 사표를 내라는 강요에 못이겨 무엇을 사과해야 하는지
영문을 모른채 정든 일터를 등지고 뿔뿔이 흩어져 새일터를 찾아 남은
정열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새일터에서 최고책임자의 위치에 올라있으며
한결같이 근면 자조 협동하는 새마을정신을 바탕으로 일한 결과라고
자부한다.

1991년 4월 주식회사 거화건설의 고광윤사장, 대한전자기업의 신표균
사장, 창녕농협지도자교육원 김규석원장 등 부산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우연히 만나 옛 이념을 되새기고, 세태에 오염되어가는 스스로의 마음을
닦으며, 새롭게 우의를 다지기 위해 발족한 "부산 연우회"는 점차
대구지역까지 열세명으로 회원이 늘어남에 따라 "영남 연우회"로 이름을
바꾸고 두달에 한번씩 빠짐없이 모인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찌 모임이 한두가지겠는가만 우리는 이 모임에
가장 큰 애착을 갖는다.

전국 어디를 가봐도 찾아볼수 없는 그 뜨겁던 새마을의 열기! 이제
이땅에서 영원히 사라진 것인가.

우린 이를 안타까워 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29일자).